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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Feb 15. 2023

여보, 잠잘 때 부탁이 있어

그리 어렵진 않을 거야.

나는 과묵하다.

수다를 글로 떨어서 그런가 실제로 입을 열어 말하는 시간은 보통 여자들의 평균시간보다 확연히 적은 편이다.


남편도 과묵하다.

원래 처음에 만날 때부터 말수가 없었다.

따라서 둘 다 말이 없지만 남편보다는 내가 말을 조오금 더 많이 하고 남편은 나의 말에 주로 반응을 담당하는 편이다.


결혼했을 무렵.

온 세상이 아름답게만 보이는 신혼 때는 말이 뭐가 필요할까.

말이 필요가 없어 말 그까짓 거 필요한 사람들이나 쓰라고 주고는 우린 눈으로 대화했다. 인간의 눈은 싸울 때만 서로 눈을 째려보듯 쳐다보는 게 아니라 마음이 한껏 푸근할 때도 서로의 눈을 빤히 쳐다볼 수가 있다. 아바타의 I see you가 그것 아니겠는가. 나는 당신을 봅니다. 나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런 뜻. 만일 그때의 시간을 지금으로 가지고 올 수 있다면, 지금 상황에 와서 그 당시의 행동을 씌워 본다면, 상상만으로도 몸이 여간 배배 꼬이는 것이 아니지만, 그래서 믿을 수 없겠지만 그 당시는 그게 가능했다.


쳐다만 보고 있으면 밥때가 지나도 배가 고픈 줄 몰랐다. 식탐대회가 있다면 그 누구도 이길 자신이 있을 정도로 최고의 식탐을 가진 나였는서로 바라보고만 있어도 시간은 너무 빨리 흘러가 버리니 끼니 때에 맞춰 밥을 챙겨 먹는 것조차 빠듯했다.

바라보는 얼굴 뒤로 보이는 우주도 아름다웠고, 우주 안의 조그만 지구는 더 아름다웠는데 단지 우리 둘만을 위해 그 지구는 자전도 하고 공전도 하였으니 굳이 우리는 수고스럽게 입을 열 필요가 없었다.

입을 꼭 열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만 입을 열었다.

결혼하면 다 하는 그것, 그래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것 맞다.

뻐뻐.

뽀뽀 말고 다른 걸 상상했다고?

아~~ 키스? 키스 그거 서양식 뽀뽀니까 그거나 저거나 비스무리하니 넘어가자.

어허. 강도의 차이와 입출입 방식이 다르다고?

그렇게 세세하게 따지지 말자.


네? 뭐요? 뽀뽀도 아니고 키스도 아닌 다른 걸 생각했는데 어쩌냐고요?

하~ 이런 참된 어른들 진짜 어떡하지?

그건 알아서 하시공. 여기서 풀어낼 소재가 아니다. 그건. (아오~~ 진짜 몬살겠..ㅋㅋ)


쨌든 말이 없는 성향인 우리 둘은 굳이 말을 많이 하려는 애를 쓰지 않고 지냈다.

사람이 변하면 빨리 죽는다는 전해 내려오는 전래유언비어 같은 말을 믿고는 우리는 오래오래 살아서 오래 마주 보려고 고치지 않고 여태껏 살아오던 그대로 생활했다.


당시 5년 차인 언니네 부부는 시도 때도 없이 전화와 문자를 주고받았지만

우린 겨우 전화도 하루에 두세 번 할까 말까.

뭐 즐겁거나 색다르고 재밌는 이야기가 아닌

상투적인, 그렇지만 신혼이니 용서가 되는 대화가 이어진다.

회사에 간 남편은 마치 아기를 집에 혼자 두고 멀리 떠난 것처럼 걱정이 되어 물어봐 주었다.


남편: 여보~ 밥 먹었어?

나: 으응~ 자긴 먹었어?


남편: 응~ 먹었지. 뭐하고 먹었어?

나: 음~ 개구리 반찬? ㅋㅋㅋㅋ


둘 다: 까르르까르르


남편: 이따 퇴근하고 얼른 갈게~~

나: 으응~~ 이따 봐.^^


하고 시답잖은 전화를 끊고 나

통화시간은 채 1분도 못 넘긴 적도 허다했다.


시간이 흘러 강산이 한 번 변하고 또 반이 변하는 세월이 흐르고

남편이 이제 곧 오십이 되는 나이가 되니 변화가 찾아왔다.


남편의 말수가 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과하게!

인간의 호르몬은 생각처럼 단순하지가 않다. 남성호르몬은 남자만 나오고 여성호르몬은 여자만 나오는 게 아니라 둘의 비율 문제라고 한 게 기억이 난다. 남성호르몬, 여성호르몬이 남녀 구분 없이 둘 다 나오지만 어느 한쪽의 양이 더 많으냐에 따라 성향이 결정되는 것인데 세월이 흘러 남편은 이제 여성호르몬의 양도 제법 많아졌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항상 질문해야 열렸던 입이

이젠 굳이 내가 먼저 뭘 묻지 않아도

귀가 솔깃한 화제를 꺼내 대화를 시도한다.


요새 세상 돌아가는 사건 사고부터 회사 돌아가는 것, 인상 깊었던 쇼츠 영상에 관한 것, 수능 볼 것도 아니면서 일타강사 김지영 강사의 이야기까지, 또 직장 동료의 신변에 관한 일, 하다못해 상사의 우등생 딸이 대학 떨어진 것까지 주욱 풀어내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어느새 한 시간이 후딱 지나가버린다.

정말 장족의 발전이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대화가 가능하다니.

이제 이 사람을 데리고 커피숍에 가도 커피값이 아깝지 않겠구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



어젯밤

역시나 즐거운 수다 삼매경에 빠진 남편.

본인이 생각해도 하루 정해진 수다를 넘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이야기를 스을 마무리하고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대화 중에도 간간이 모니터를 쳐다보았던 나는 남편이 내 방을 나간 후에도 남은 일을 마저 하고 있었다.

30여분이 지났을까.

집중하여 일을 하다가 혹시 거실에 남편이 아직 있는 건가, 그리 이야기를 실컷 했어도 내가 혹시 거실에 나오기를, 더욱 심도 있는 대화를 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 고개를 빼꼼 내밀어 거실을 보았다.


엥...?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미주알고주알 종알종알 살갑고 다정하게 이야기하던 남편이 거실에서 사라졌다. 안방 문이 여닫는 소리가 전혀 안 났는데 자러 들어갔나 보다.


나 먼저 잘게


라는 말도 없이...

어쩐지 조용하다 했어.


이쯤에서 어릴 적 줄기차게 불렀던 뽀뽀뽀 노래를 한 번 살펴보자.


아침에 일어나면 뽀뽀뽀~

만나면 반갑다고 뽀뽀뽀~

헤어지면 또 만나요 뽀뽀뽀~


이 노래 모르면 간첩이다.

초반부터 자꾸만 뽀뽀에만 온 신경을 집중해서 읽으시는 분들이 계신데 이제 그만 그 생각은 좀 넣어두시고, 또 뽀뽀뽀에도 눈길을 좀 거두시고, 뽀뽀뽀 앞을 좀 보자.


아침에 일어나면/ 만나면 반갑다고/ 헤어지면 또 만나요


이건 무얼 말하는 것인고 하니

이건 모두 인사를 해야 할 타이밍을 가리킨다.

안부인사의 중요성을 유치원 시절부터 세뇌가 되도록 저리 강조하였던 것이다. 유치원생도 자러 들어갈 때면 안녕히 주무세요~하고 인사해야 한다는 걸 아는데


먼저 잘게. 잘 자~

라는 말도 않고 스윽 들어가 자러 가는 게 말이 되나.


이쯤에서 생각나는 노래

박원의 all of my life

생각이 나니 버즈를 귀에 꽂고 노래를 온몸으로 느껴본다.



https://youtu.be/ZmGTgGWfpKA



기분이 별로면 기분과 맞춰 노래를 들으랬다.

기쁘면 기쁜 노래를

슬프면 슬픈 노래를.

그래서 비슷한 감정선의 노래를 들은 것인데 듣고 있자니 기분이 더욱 착 가라앉는다. 어떡하지?


들어가기 전에

나 자러 간다.

하고 말하는 게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


거실에 계속 있을까? 아니, 평소처럼 없을 거야. 아니야 있을지도 몰라.


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쳐다봤는데 없으면

왜 그리 허전한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나 보다.


이런 걸 말을 해서 엎드려 절을 받기는 참 애매하다.

아, 물론 엎드려 절을 받아 본 적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내가 무슨 마님도 아니고 돌쇠야~ 문안인사를 매번 올리거라 하고 강요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 스스로 좀 내려놓기로 했다.


한데 적응의 동물인 사람을 그냥 이렇게 두면 습관이 되어 버릴 가능성이 높아

이제 와 말을 새로 꺼내자니 마음으로 우러나오지도 않는 인사를 그렇게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인가 그것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말을 안으로 삼키고 계속 이해하고 넘어가기도 마음이 쓰다.




내 글을

남편은 읽지 않는다.

가끔 남편이 빠지면 성립할 수 없는 글을 주제로 용기 내어 글을 쓰고도 내심 걱정되어 혹시 내 글을 읽었는지 물어보면 거짓말이라고는 전혀 할 줄 모르는 남편은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아니"라고 말하므로

이 글도 딱히 그렇게 신경 쓰이지는 않는다.

분명 안 읽을 것이다. 글 알레르기가 있는, 글과는 상극인 그 이므로.


한데 제목이 "여보"로 시작하는 글이니 읽지 않을까?

이 세상에 나의 여보는 하나이니.

이렇게까지 썼는데  

오늘 밤은 어떻게 하고 들어가 잘지 궁금하다.


과연 잔다는 인사를 하고 들어가 잘까.

아님 역시 안 읽을 테니 인사 없이 평소와 같은 행동을 보여주려나.


기대가 된다. 어찌할지.


박원 노래의 마지막 가사인

"어디선가 듣고 있다면 니 얘기가 맞아."가  떠오른다.


이 이야기,

남편 니 얘기가 맞아. ㅎㅎ


굿 나잇 인사를 안 하는 자.

모두 유죄.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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