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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Feb 07. 2023

지옥철이 앗아간 내 신발 한 짝

어디에 있든 잘 살아야 해


"순풍 산부인과", "지붕 뚫고 하이킥" 등 한때 시트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다. 요새도 유튜브로 과거 영상을 손쉽게 볼 수 있으니 오래전에 방영했지만 내 기억에 남는 유명 시트콤은 그 당시 태어나지 않은 지금의 어린 친구들도 모두 알만큼 아직도 대단한 인기몰이 중이다.


그 재미난 걸 생생하게 본방으로 봐야 더 재미있을 텐데 "지붕 뚫고 하이킥"을 끝으로 시트콤이 더 이상 나오지 않으니 앞으로 새로운 시트콤을 보게 될 가능성은 더 희박해졌다. 물론 최근 이서진, 라미란 등이 출연한 병원 배경의 시트콤 같던 드라마가 방송하기도 전에 열혈 홍보를 해가며 대박이 날 것이라며 모두 기대를 모은 적도 있었지만, 배우들의 지나친 오버연기에 시청자들은 어디에 눈을 둘지 몰라 난감해하다 결국 시청률은 바닥과 키스를 해버리는 민망한 결과만 가져오고 말았다.


소리도 없이 망해버린 시트콤이 너무 그리웠는지 결국 나는, 나 혼자 시트콤을 찍고 앉아 있는 경지까지 이르렀으니...






때는 약 이십여 년 전 내 나이 이십 대 중반

장소는 강남 한복판 어느 지하철 역.

시간은 혼잡한 아침 출근시간이다.


아침 출근 시간은 생각만 해도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게다가 강남 한복판의 지옥철이라니... 지금도 상황은 여전한지 아침출근 시간을 안 겪은 지 꽤 오래되어 잘은 모르겠지만 그 당시 굉장히 사람이 많을 때는 두 발이 땅에 닿지 않고도 사람들에게 밀려 이동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혼잡 그 자체였다.


지하철이 들어오는 배차 간격보다 차를 타려 모여드는 인파 속도가 더 빠르니 안 그래도 혼잡한 역내에 차가 들어오면 더욱 정신머리가 사납다. 이번 차를 놓치면 지각일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살짝살짝 새치기를 하려는 낌새가 보일라치면 이미 줄을 서 있던 사람은 자신의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 굳건하게 자기 자리를 버텨내했기에 소리만 없었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나도

그 아수라장 한복판에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서 있었다.


한여름이라 당연히 샌들을 신고 있었는데 뒤축에 따로 끈이 없는 슬리퍼 힐 모양이었다. 오래 갈 것도 아니고 두 정류장만 지나면 내려야 해서 일부러 사람들이 모두 차에 타기를 기다렸다가 거의 막바지에 차에 올랐다. 만일 사람들에게 떠밀려 차를 제일 처음 타게 되면 큰일이었다. 내 뒤에 타는 사람들은 차 안의 모든 승객과 밀기 대결을 벌이듯 쭈욱 쭈욱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밀어가며 탔으므로 그 때문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의 몸은 차 안 깊숙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꼴랑 두 정류장 후에 내려야 할 나는 지하철 내 한복판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돼버렸다. 샌드위치 빵 사이에 꽉 끼어 축 늘어진 피클의 신세가 되어서는 열리고 닫히는 지하철 문을 속절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다. 고작 2미터도 안 되는 문에 닿을 수 없어 바라만 봐야 하는 나의 마음은 얼마나 당황스럽고 슬펐는지...


지하철 짬밥이 얼만데 속수무책 안으로 밀려 들어갈 수는 없어서 어느 정도 사람이 탔다 싶었을 때 가까스로 마지막에 올라타는 노하우를 터득했다. "안 계시면 오라~~~ 이"를 외치는 버스 뒷문에 매달리듯 서 있었던 옛날의 그 여차장처럼.


그날도 거의 사람들이 얼추 탄 듯하여 문이 닫히려고 하기 직전에 겨우 낑겨서 타는데


허억... 발이 시원하다.


발 앞쪽을 타이트하게 잡아주던 쫀쫀한 느낌이 단번에 스르르 풀리고 발이 해방을 맞은 느낌이 든다. 힐을 신은 발은 가끔 불편하다고 내게 투정을 부려댔으니 늘 갈망하던 자유였겠지만 뜻밖이고도 갑작스레 찾아온 자유는 날 당혹스럽게 할 뿐이었다.


헉. 잽싸게 돌아보니 차와 승강장 사이 틈에 내 신발 하나가 빠져 날 바라보고 있다. 어서 자길 구해달라며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구할 새가 없다. 내가 제일 마지막에 탔으니 문은 스르륵 닫혀버리고 말았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이제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지? 어떡하지?! 이제 난 회사에 어떻게 가지? 어떻게 걷지? 어떻게 서 있지? 어떡하지?


내 평생에 해야 할 어떡하지 라는 말을 몽땅 써 버린 날이 아니었을까 싶다.


미처 작별인사도 못하고 떠나보낸 내 신발에 집중하느라 바로 내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나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경 쓸 겨를조차 없다. 차라리 아무도 몰랐으면 싶었다. 아무와도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나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나는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내 양쪽 발은 모두 제대로 신을 신고 있다는 듯 그렇게 난 배우가 되어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내 뒤에도 빼곡히 사람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 겨우 주먹 하나 둘 정도 공간만을 두고 다닥다닥 밀집해 서있었는데 그 때문에 고개도 까딱할 수 없어서 허리 아래보다 더 밑인 다리 밑 상황은 다행히 모르는 듯했다. 계속 연기를 하고 있는 나. 최소 7센티는 거뜬했던 샌들의 키를 맞추기 위해 내 왼쪽 발은 뒤꿈치를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깨가 기울어져 보이니 나는 배우다, 나는 배우다 최면을 걸면서 계속 까치발로 서있었다.



아... 첫 번째 고비.

정류장이란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 오른쪽입니다." 숨을 가다듬고 마음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그대로 몸을 왼쪽으로 살짝만 돌려 내릴 사람은 내리고 탈 사람은 타게끔 한 뒤 다시 문이 닫히고 문 쪽을 바라보고 또 섰다. 자칫 잘못하여 마주보고 서게 되면 뽀뽀하는 연인도 아니면서 뽀뽀하는 자세처럼 두 얼굴이 마주 보고 밀착이 될 것이니 지하철 정 중앙을 기점으로 서로 왼쪽문에 가까운 사람은 왼쪽을 바라보고 오른쪽문에 가까운 사람은 오른쪽을 바라보고 서야 했다. 지하철 에티켓을 누구에게도 배운 적은 없었지만 그건 승객들만의 암묵적 룰이었다.


이제 또 고비가 찾아올 것이다.

문이 열리면 이제 내가 내려야 하는데 서 있는 건 그래도 연기가 제법 괜찮았는데 아... 내리면 이제 다들 나만 쳐다볼 텐데 이를 어쩐다. 또다시 찾아온 고비에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이제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지? 어떡하지?! 어떡하지를 한 백만 스물두 번은 중얼거린 것 같았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이라는 친절한 안내방송이 나오고 이제 또 문이 열릴 텐데.

머릿속은 하얘지고 아무 생각은 안 나지만 정신을 차려야 한다.


드디어 문이 열렸다. 잽싸게 1등으로 내린 나는 잠시 허리를 구부려 오른쪽에 신고 있던 나머지 샌들 하나를 벗고 손에 쥐었다.


그리고...

달렸다.

뒤도 보지 않고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아침부터 정신없이 내달리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할까.


맨발의 디바 이은미가 나타난 줄 알려나. 무대 위에서 감성을 모두 쏟아내는 데 신발이 걸리적거린다며 신발도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의 디바 이은미처럼 나 또한 진정성 있는 마음으로 회사를 다녀야 함을 설파하는 맨발의 직장인인 줄 알려나. 누가 날 쳐다보는지 안 쳐다보는지 너무 궁금했지만 뒤를 돌아보면 망부석이 될 것만 같다. 누군가 나를 쳐다보면 메두사처럼 그를 돌로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냥 전력질주를 했다. 초등 1학년 때 100미터 달리기 22초가 나온 나지만 아마 지금 재면 12초가 나오지 않을까 달리는 와중에 그런 생각도 들었다.


마침 내가 내린 역은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처럼 지하철 역 안에 가게가 제법 있었는데 그중 신발가게가 하나 있던 것을 용케 기억해 내었다. 잽싸게 뛰어 들어가서 손에 들고 있던 샌들을 주인아저씨께 쥐어 주고 헉헉거리며 "사장님. 샌들 아무거나 235로요. 빨리빨리." 하고 외쳤다. 그리곤 잽싸게 신고 회사로 뛰듯 걸었다. 이젠 걸어도 되지만 뛰었다. 같은 지하철에 있던 사람과 마주치고 싶지가 않았다.



회사에 도착해 숨을 고르고 내 자리에 앉아서 마치 1년 같던 아침 출근 시간을 떠올리며 내 발을 쳐다봤다.

발바닥은 음...

온갖 고생을 도맡아 한 내 발이지만 시커먼 내 발을 보니

내 발 안 하고 싶었다.



출처. 쿠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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