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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Aug 12. 2023

구렁이 같은 지렁이 구해주기

쨍한 대낮.

"태양을 피하는 방법"을 잘 아는 가수 "비"에게 도대체 저 이글거리는 태양은 어찌 피할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 울렁울렁거린다. 한여름 초절정에 달한 듯 더위도 이런 더위가 없다.


아이들과 걸어가는데 바닥에 뭔가 실뱀처럼 꿈지럭거리는 걸 본 것 같다. 설마 뱀인가? 목을 움츠리고 쳐다보는데 환대가 뚜렷한 게 지렁이다. 장장 길이가 20센티는 족히 되어 보인다. 길이에 비례하여 두께도 상당하다. 환대만 아니었으면 실뱀인 줄 알고 피해 갔을 법한 크기다.


그것을 피해 폴짝 뛰어 두어 발자국 걷는데 슬슬 걱정이 된다. 이 뙤약볕에 다리도 없는 저것이 꿈지럭거리다가 하늘나라로 갈 것이 뻔해서였다. 요즘같이 기온이 높은 날은 반려견도 신발을 신고 나와야지 안 그러면 발바닥에 화상을 입는다고 하던데 다리도 없는 지렁이는 온몸에 화상을 입으리란 건 불 보듯 뻔했다.


그냥 지나치자니 이건 미필적 고의 그것과 다름없다. 분명 말라죽을 것이다. 흙 쪽을 향해 기는 것도 아니고 바보 같은 것이 자꾸만 시멘트로 덮인 단단한 도로 쪽을 향해 몸을 움직인다. 잠시 외출을 나온 거면 다시 땅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흙 한 줌 없는 매끈한 도로 쪽으로 그것도 필사적으로! 아, 맞아... 지렁이는 눈이 없지. 곤충처럼 더듬이라도 있었다면 방향 잡기가 그나마 수월했을 텐데 그마저도 없으니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겠지. 아무튼 고놈 참 무지하게 신경 쓰인다. 저걸 어떻게 해야 하나 바라보고만 있는데 막둥이가 한 마디 한다.


"나 한 번만 만져보고 싶어."

"엉???"


아마 아이 아빠였다면 "그래라~" 했겠지만, 난 지렁이를 만진다는 그 말이 내 손에 꼭 지렁이가 닿는 기분까지 들어 기겁하며 "만지지 마!!"라고 이야기해 버렸다. 그것의 몸에는 당연히 흙이 묻어 있을 테고 또 점액질로 덮여 있을 테니 만진다는 게 탐탁지 않았다. 반면에 남편은 곤충을 맨 손으로 때려잡을 때도 내가 왜 맨손으로 하느냐고 뭐라 할 때면 늘 "이 세상에서 사람이 제일 더러워."라고 하는 사람이라 분명 한 번 만져보라 했을 것 같긴 하다만 그러거나 말거나 내 눈으로 내 아이의 손이 미끈미끈해지는 과정을 보고 있기가 싫었다.


결정했다.

이놈을 그냥 두고 가면 하루 종일 찜찜할 것 같았다. 바로 옆 화단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지렁이를 들어서 흙 쪽으로 보내기로 했다. 내가 하려는데 딸아이가 하겠다고 나뭇가지를 가져갔다. 다행이었다.  


딸아이가 얇은 나뭇가지를 지렁이 몸에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둥근 몸 아래로 나뭇가지를 집어넣어야 하는데 저런, 뾰족한 끝이 지렁이 몸을 찌를 판이다. 자칫하다간 화상으로 죽는 게 아니라 나뭇가지에 찔려 죽을 수도 있겠다. 도로의 블록과 블록 사이에 난 조그만 틈 사이로 나뭇가지를 집어넣어서 지렁이를 들어 올려봐 하고 옆에서 조언해 주었다.          


지렁이를 들어 올리는가 싶더니 아이코, 균형이 안 맞으니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지렁이. 길이가 20센티 가까이 되니 나뭇가지에 걸쳐진 양쪽 무게를 균형 잡기가 쉽지 않다.

"잘해 봐. 그러다 실족사하겠어. 아참. 얘는 다리가 없지. 그럼 추락사인가? 아무튼 떨어지지 않게 잘해 봐."

결국 세 번 정도 땅을 향해 다이빙한 지렁이를 네 번만에 겨우겨우 화단 안으로 넣어 주고 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기운 내서 땅을 파고 더위를 피해 제발 잘 살기를 마음속으로 빌어 주었다.

안전한 곳에서 위험하지 않기를.


안전을 이야기하다 보니 김승희 님의 시 <안전선 밖으로>가 떠오른다.




<안전선 밖으로>


                          -김승희


승객 여러분은 안전선 밖으로

물러서 주시길 바랍니다......

아무도 안전선을 침범해 들어간

사람도 없는데

(중략)

어두운 지하철 역에서

나의 발은 확고하게 안전선 밖에

서 있으며

(중략)

이윽고 전동차가 들어오면

나의 발은 잽싸게 안전선을 뛰어넘어

훌쩍 객실 의자로 삼켜지네.



기차나 지하철의 승강장에서 "안전선 밖으로 물러서 달라"는 안내방송에 대해 예전에 참 말이 많았다. 안전선이라면 안전하게 선 "안"으로 들어가 있어야 마음에 안정을 찾을 수 있을 텐데 "밖"을 선택한 게 화근이었다. 묘한 불안감이 인다. 요새 우리는 안전한가. 그 어떤 것에도 보호받지 못하는 선생님들, 아무 이유 없이 무차별적인 공격에 목숨을 잃는 선량한 시민들, 나쁜 어른들로부터 성폭행당하는 아이들,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죽임을 당하는 아기들...


우린

눈이 없는 지렁이처럼 지금 안전선 밖으로 나와 있는 건가.





*대문사진- 오랜만에 직접 찍었으나 맞춤법이 틀렸네요. "출입을 삼가세요"가 맞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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