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그 반대인 성선설이 맞는다고 한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이렇게 흉흉해서는 안 된다. 말도 안 되는 범죄가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하고 있으니 나는 도저히 성선설을 믿을 수 없다. 그러니 사람은 태어나기를 성악설에 근거하여 악하게 태어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태어날 때부터 악하게 태어난 인간을 그냥 내버려 둔다면 이 세상은 어찌 될까. 제대로 굴러가기는커녕 온 세상은 무법천지가 될 것이다.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갑자기 나타났지만 우리 주변에 늘 있어왔던 악당들처럼,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극한에 내몰리니 아수라장이 된 아파트의 주민들처럼.
그러니 지금처럼 사람 사는 꼴이라도 갖추기 위해서 지금의 교육기관이 존재하는 것이다.
교육기관에서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배우고, 예절을 배우고, 도덕을 배운다. 또, 선하게 살아야 행복해질 수 있다며 권선징악의 교훈을 배운다. 이렇게 늘 착하게 살아야만 한다고 강요 같은 교육을 받아야만 그나마 선하게 변화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이미 입증하고 있는 것 같다.
얼마 전 이보영과 손나은 주연의 드라마 "대행사"를 뒤늦게 정주행 하였다가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것 같은 충격적인 대사를 들었다. 아주 완벽하지는 않지만 아직도 대사 중간중간이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다.
재벌 3세이자 인플루언서인 손나은과 그녀의 비서 한준우는 공주님과 머슴 같은 관계이므로 둘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여자는 결국 머슴을 운명 같은 자신의남자로 느끼기에 이른다. 문무에 능한 이 남자는 천방지축인 여자를 보필하고 집사이기도 하면서 스위트한 경호원 역할까지 해냈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재능으로 보나, 지능으로 보나여자에 비해 하등 뒤처지는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신분 차이를 극복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을 단념하라는 의미로 이런 말을 건넨다.
사람들은 직업에 귀천(貴賤)이 없다고 하지만,
직업에 귀천이 있기 때문에 없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애초에 귀천이 있기 때문에 없다고 가르친 거라는 말.
영화 '설국열차'에서 꼬리칸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급기야 인육을 먹기까지 하는데 머리칸의 사람들은 이들과 전혀 다른 세상인 듯 풍족한 삶을 이어간다. 머리칸 사람들의 자식들만 모아 교육을 시키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서 교사는 아이들에게 이런 말로 세뇌시킨다. "설국열차의 지배자 윌포드를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추앙합니다." 율동까지 곁들여 가며.
열차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운행되려면 자신들이 원하는 이념과 사상과 가치관을 아이들에게 세뇌시켜야 평화로운 운행이 가능할 테니.
직업엔 귀천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진 자들이다. 갖지 못한 자들은 "직업엔 귀천이 없다."는 말을 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가진 자들은 자신의 발아래에 있는, 돈 없는 사람들을 자신의 수족처럼 편케 부릴 수 있으려면 그들이 그 어떤 하찮은 일을 하더라도 불평 불만할 수 없도록 세뇌시켜야만 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 말인 것이다.
"직업엔 귀천이 없다."
다소 나의 주장이 엉뚱하고 발칙하다고 느껴지는가?
마구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가?
이 말에 나를 포함하여 아무도 토를 달 수 없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가 있는데
귀천(貴賤)이란 말에 걸맞게 부득이 귀한 직업과 천한 직업으로 나눈다고 한다면, 천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받는 일한 대가가 지금처럼 터무니없이 적을 게 아니라 가진 자와 격차가 너무 심하지 않도록 많아지게 만드는 방법뿐이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그제서야 직업과 귀천에 관한 저 말에 수긍할 수 있을 것 같다.
갑자기 일그러진 나의 얼굴 표정이 궁금하여 거울을 쳐다봤더니 이 아이가 떠올랐다.
"췟, 정책을 바꾸는 사람은 가진 자들인데 내가 이렇게 백날 떠들어 봐야 정책이 바뀌겠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