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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Dec 01. 2023

1년 전의 내가  날 찾아와서는 안아 주고 토닥토닥

아이를 낳고 나면 엄마는 초인이 된다.

단체사진 속 그 많은 아이들 중에서 단번에 내 아이를 찾을 수 있고, 그 시끄러운 군중 소리에 파묻혀도 내 아이 목소리라면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


몸은 집안에 있지만 내 귀는 벌써 마중을 나갔는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내 새끼 소리가 들려온다. 희미한 소리는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조잘조잘 쉬지 않고 나지막이 들리더니 이내 점점 커진다.

평범한 하루 끝에 오늘 있었던 일들을 도란도란 나누는 소리인데, 평소와 다른 게 있다면 조금 격앙된 소리라는 거?


아이들의 목소리는 더욱 또렷해졌고 현관문이 열렸다.

그리고 막둥이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엄마!! 1년 전 우리가 우리한테 엽서 보낸 게 드디어 왔어!



예능 프로그램에서 가끔 사회자가 게스트에게 이런 주문을 한다.


미래의 나에게 영상편지 한 번 부탁드려요.


그럼  요청을 받은 연예인은 겸연쩍은 듯, 쑥스러운 듯, 미래의 자신에게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하던데 딱 그 기분이었다. 최근 "장도연의 살롱 드립"에 게스트로 나왔던 배우 이진욱은 이 같은 질문을 받고는 미래의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행복하게 해 줄게!


라고.

이야기하며 얼굴에 순진한 미소 한가득 실어 웃는 모습에 마음이 말캉말캉해졌었다.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영상편지는 저렇게 성공한 연예인들이나 하는 거지, 내가 살면서 저런 영상을 찍을 날이 오겠나 했었는데, 나에게도 그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1년 전의 내가 나에게 왔으니 말이다.


1년 전,

그러니까 글을 쓰면 서랍에 꽁꽁 넣어 두기만 했었는데, 이젠 브런치에 발행 가능하다는 합격 메일을 받고는 기쁜 마음과 함께 그 다음 날 묵호항으로 떠난 가족여행에서 우연히 느린 우체통을 만나게 된 거였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엽서를 쓰고 또 쓰고 했지만, 나는 왠지 인생 다 산 것처럼 별로 흥미롭지 않았다. 그런 나인데 아이들은 굳이 나의 손에 엽서와 펜을 꼭 쥐어주었다. 엄마도 쓰라며.


글 몇 자 쓰는 거야 어려운 일 아니지 싶은 마음에 몇 자 끄적 써 내려가긴 했는데, 그 엽서가 세월이 흘러 드디어 내게 온 것이다. 약속이라면 칼같이 지키는 남편은 지난 10월 중순쯤, 엽서 썼던 일을 기억해 내고는 엽서가 왜 안 올까 서로 의아해했다가 근 한 달이 지나도 오지 않길래 분실됐구나 하고 좀 아쉬워하던 차였는데, 확실히 느린 편지가 맞았다. 정말 참 많이 늦었다.

1년 하고도 거의 두 달이나 더 지나 받았으니. :)


엽서에 인쇄된 사진이미지를 먼저 감상하고 조금씩 떨려오는 마음으로 엽서를 뒤집어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고작 1년이 흘렀을 뿐인데 내가 뭐라 썼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람은 역시 망각의 동물인가 보다.  저승 갈 때 저승이가 주는 망각의 차를 안 마셔도 될 것 같은 느낌이다.


보자 보자. 뭐라고 썼나 보자. (두근두근)

1년 후에도 열심히 글을 쓰고 있으려나?

라고 쓰여 있네.


사실 요즘 글을 쓰는 것에 대해 약간 회의가 느껴지던 차였는데 타이밍도 절묘하다. 이러려고 예정보다 두 달이나 늦게 내게 온 걸까.


살짝 주춤하고 멈칫하던 날에

내가 나에게 보내는 응원이라니.

1년 전의 내가 날 찾아와서는 안아 주고 토닥토닥해 주다니.

괜히 묘하고, 짜릿하다.



느린 우체통을 마주치면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할 이유다.



묵호항 "느린 우체통"에서 썼던 엽서. 한 장은 내 것, 나머지 다섯 장은 아이들 것. 참 많이도 썼네. ^^


*대문 이미지. 장도연의 "살롱 드립" 유튜브 영상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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