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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Dec 06. 2023

살다 보면 한 번씩 실수도 하고 그러는 거지 뭐

처음 실수는 괜찮아요

외식 따위는 학교 졸업식 때나 가는 대단히 특별한 건 줄 알고 지내던 학창 시절이 끝이 났다.

3월 대학 입학을 앞두고 놀면 뭐 하나 싶어 아르바이트를 구하던 중, 떡볶이와 김밥이 주력인 분식집 유리창에 아르바이트 구함 공고가 붙은 걸 보고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말이 아르바이트지 실상 직원이나 마찬가지였다. 1996년 겨울에 한 달 일하고 백만 원을 벌었으니 말이다. 당시 시급이 3천 원이었고 (2023년 현재 시급은 9,620원이니 옛날 사람 자동 인증일세...)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매일 12시간을 때로는 13시간을 일한 적도 있었으니. 게다가 만두까지 맛집이었던 가게는 사장님 부부가 직접 손으로 만두소, 만두피 모두 만들어 파는 곳이었는데, 만두소에 들어갈 대용량의 쪽파를 남자 사장님이 썰어내는 날에는 내 노동력은 물론, 눈물까지 쏟아붓게 했다.


그렇게 하루가 이틀이 되고, 사흘, 나흘이 지나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다달이 적금 붓듯 하루하루 돈은 모이고 쌓였고 드디어 월급날! 봉투에 두둑하게 배춧잎 100장을 그득 담아 주셨으니 더욱 보람찬 한 달을 보냈구나 뿌듯해졌다. 생애 첫 월급은 다들 부모님께 빨간 내복을 선물한다던데, 이제 스물을 앞둔 나는 아직 쉰도 안 된 엄마께 빨간 내복은 좀 아니다 싶었다. 가뜩이나 노화가 빨리 온다고 속상해하는 엄마에게 할머니들이나 입을 법한 빨간 내복을 입힐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우선 엄마와 단 둘이 외식을 하기로 결정하고는 주머니에 현금을 넉넉히 챙겨 넣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앉으면 엉덩이가 따땃해져 오는 온돌방 구조의 널찍한 감자탕집이 눈에 들어왔다.

씹고 뜯고 맛보아야 제대로 먹었다는 느낌이 들 것만 같아 엄마와 손에 손을 잡고 들어가 앉았다.


모름지기 주문이란 한 턱 내는 사람이 호기롭게 하는 게 제 맛이지.

메뉴판 뭐 볼 거 있나. 감자탕 전문점이라 감자탕의 사이즈만 선택하면 끝이다.

당당한 목소리로 외쳤다.


"여기요! 저희 감자탕 소짜 두 개 주세요!"


주문을 받으러 온 종업원이 엥? 하는 소리만 내지 않았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일행이 더 오세요?"

난 더욱 당당한 목소리로


"아니요!"


"그런데 왜 감자탕 소짜 두 개를?"


아니, 손님이 왕인데(요즘은 많이 바뀌었지만 그 당시는 이 멘트가 거의 다 통하던 시절이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줄 것이지 하고 내가 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요새 흔히 말하는 맑눈광(맑은 눈의 광인)이 되어 종업원을 빤히 쳐다보았다.


부끄러움은 깡그리 엄마 몫이 되어버렸고, 아직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리 없는 얼굴에 철판을 깐 딸 덕분에 볼이 뻘게진 엄마가 종업원을 보고 급히 내 말을 막았다.


"아~ 우리 딸애가 실수했네요. 감자탕 소짜 하나만 주세요."


그렇게 엄마가 종결시키도록 가만히 있을 일이지... 나는 기어코 한 마디 더 보태고 말았다.


"엄마! 나 돈 많아. 소짜 두 개 시켜도 돼."

"쓰읍, 아니야. 넌 가만있어."


황급히 엄마는 우리 집 뽀삐에게 자주 하던 "기다려"와 다름없는 "가만있어"를 내게 말하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웃음이 감도는 눈으론 날 노려보았다. 눈은 웃는데 앙다문 입술은 모나리자의 표정보다 더 오묘했다. 날 저지하기 위해 인상을 쓰는 건지, 웃음이 터져서 참으려 인상을 쓰는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엄마의 만류로 종업원은 뒤돌아 나갔지만 갸우뚱하던 고개는 풀지 않았다.

후에 뭐가 문제인지 자초지종을 들었다. 자초지종이라 할 것도 없이 간단명료했다.


그냥 여기선 그렇게 시키는 거 아니라고 했다. ㅡ.ㅡ


자칫하면 엄마 손 잡고 다정하게 들어간 감자탕 집에서 갑자기 엄마와 나는 철천지 원수로 돌변해 각자 테이블을 따로 잡고는 엄마 따로, 나 따로, 따로따로 앉아 모르는 타인처럼 감자탕 소짜 하나씩 끼고 앉아 고독을 씹으며 고기만 열심히 뜯어먹을 뻔했다.


대, 중, 소 크기로 분류한 건 짜장이나 짬뽕의 곱빼기 차원인 줄 알았지.

그래서 두 명이서 소짜 하나로는 택도 없을 줄 알았지.

감자탕집의 체계 따위

아직 졸업도 안 하고 학교 집, 학교 집만 오가던 고3 나부랭이인 내가 뭘 알았어야지.


그날 나는 살코기를 뜯으면 뜯을수록, 버너의 푸르스름한 불빛도 같이 삼킨 것처럼 얼굴이 점차 붉게 타올랐다. 화끈거리는 얼굴은 버너와 가까워서 뜨거웠던 건지, 뱃속에 창피덩어리가 불끈불끈 솟아올라 뜨거웠던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처음은 원래 다 그렇다.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하고, 모를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으며 또 배우며 살아가는 거라고 20년이나 훌쩍 지났지만 아직도 생생한 그때의 나에게 나는 애써 위안을 보내본다.

                                                                 

다들 실수도 하고 그러면서 사는 거지. 하지만... 고개를 들 수가 없네. ^^;;  (이미지 출처. 블로그 tack2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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