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시간에 많은 책을 읽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책 읽는 속도가 참으로 느린 건 어릴 때나 어른이 되서나 한결같습니다. 휘리릭 읽어 버리다가 작가가 의도한 것을 혹시나 내가 놓치는 것이 있을까 싶어 꼼꼼하게 읽기 때문이 아닐까 변명해 봅니다. (속독하는 사람들이 너무 부럽...) 어릴 때 만화책을 읽을 때도 그림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본 기억이 납니다. 따라서 글보다 그림이 많다고 책장이 빨리 넘어가지는 않습니다. 그렇다 보니 그림 하나 없는 활자만 있는 책을 읽을 때는 더더욱 책장이 느리게 넘어갈 수밖에요. 글을 쓰는 작가든, 그림을 그리는 작가든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창작물을 진득하고 찬찬히 감상하고 싶어서인가 봅니다. 내 글이 소중히 읽히길 원하면 남들도 마찬가지겠지 하는 마음이랄까.
시간이 오래 걸리다 보니 다른 사람들보다 책 한 권 완독이 더욱 힘듭니다. 한 달에 한 권 읽으면 다행이다 싶게 읽어 왔지요. 책 말고도 볼거리가 넘쳐나는 재미있는 게 너무 많은 세상이라는 이유도 한몫 단단히 합니다. 나름 글 쓰는 게 취미라는 사람이 책을 이다지도 안 읽는다는 건 직무유기가 아닐까 싶어 마음 한켠이뜨끔하니 따갑습니다.
안 되겠습니다. 읽어야겠습니다.
읽을 책 마련은 문제없습니다. 다 읽지도 못할 거면서 책 욕심은 오지게 많은 나는 도보 2분 거리 시립도서관에서 책을 미리 참 열심히도 빌려다 놓았거든요. (읽기만 하면 됩니다.)
한 사람당 최대 7권을 빌릴 수 있고 가족 계정이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28권을 가득 채워 집에다 모셔 둘 수도 있지만 그래봐야 달팽이가 집을 이고 다니듯 책을 매일 이고 지고 다닐 게 뻔하므로 자제하도록 합니다. 최대 권수의 반절인 약 15권이 내 책상 왼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잘 참았다.)
아! 문제가 있습니다.
책 한 권을 들고 진득하게 읽지 못하는 내가 제일 문제가 되겠습니다. 지루한 걸 제일 못 견뎌하는 나는 읽다가 공감이 안 가거나, 이해가 안 되거나, 다소 지겹다 싶으면 더더욱 진도를 나갈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럼 책갈피 대용으로 준비해 둔 인덱스 모양 포스트잇을 주저하지 않고 붙인 후 책을 덮습니다. 그리고 두 손을 턱에 괴고 꽃받침을 하고선 책이 가득한 책꽂이를 흐뭇하게 바라봅니다. 어느 것을 읽을까 알아맞혀 봅시다 딩동댕~ 흥얼거리면서요.
새로 읽을 책을 결정하면 아까 읽다 덮었던 책과 자리를 맞바꾸어 놓고 새 책을 또 읽어 내려갑니다.
책을 바꾸어 가며 읽다 보면 마치 여러 채널이 있는 TV를 골라 보는 듯한 생각도 듭니다.
우선 대하소설 한 꼭지를 읽었으니 대하드라마 <태백산맥>을 한 회차 본 것 같습니다. 소화가 꺼낸 정하섭의 이야기를 듣고 기함하는, 소화 모친이자 무당이면서 풍으로 누워있는 월녀의 당황하는 표정이 보이는 것 같은 생생함에 드라마 한 회차 분을 숨 가쁘게 읽고 나니 여운이 오래 남습니다.
명상의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우리말 바른말 프로그램을 보듯 <우리말 잡학 사전>을 펴 읽어 봅니다. 단어 몇 개의 어원만 익혔을 뿐인데 포만감이 느껴집니다.
곧이어 현대소설을 잽싸게 집어 페이지를 엽니다. 앞서 본 드라마가 사극이었다면 이제는 현대물이 된 것이죠.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니 뇌운동을 시키느라 속도가 느렸다면 현대물은 그보다는 속도가 조금 빠릅니다.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행동과 모습을 상상하며 긴박감 있는 문장들을 재빨리 읽어 내려갈 수 있습니다. 하늘로 올라간 수진이를 수진모 정아는 과연 구할 수 있을지 만일 이 책 <달의 아이>가 실제로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어떤 배우가 잘 어울릴까 생각하면서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현대물 드라마 한 회차가 끝이 났습니다.
TV를 보면 중간에 광고가 삽입되듯 저에게도 화면전환이 필요합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내 마음의 문장들>을 읽으며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봅니다. 맨 첫 장에 나온 "사랑, 이라고 썼더니, 그 뒤로 쓸 수가 없었다."라는 글귀는 여전히 내 마음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 귀한 글귀입니다.
책을 제법 읽었더니 눈이 좀 피로해집니다. 달달한 커피를 한 잔 타 가지고 와서 다시 책상에 앉아 다정한 이야기가 가득한 봉부아 작가님의 <다정함은 덤이에요>를 읽어봅니다. 완전히 내 취향인 시트콤 같은 이야기의 연속이므로 맘먹으면 휘리릭 완독 해버릴 수 있는 유일한 책이지만 오래 함께 하고 싶어 일부러 조금씩 아껴 읽는 책입니다. 특별할 것 없는 편의점 일을 하며 일어나는 일상이야기인데도 글 말미는 언제나 날 흐뭇하게 미소 짓게 합니다.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된 배대웅 작가님의 <최소한의 과학 공부>는 나를 위해서도 또 조금 지나면 아이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책일 것 같아 큰맘 먹고 구매했는데 내 소유물이라는 안심에 뒷전으로 살짝 밀렸습니다. 도서관에서 대여한 책을 어느 정도 얼른 반납하고 찬찬히 읽어 봐야겠다고 다짐을 해보는데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이 됐네요.
책으로 시작해서 책으로 마무리를 하다 보니 하루가 홀딱 지나가버렸습니다. 책 한 권만 들고 있다가 몇 장 읽고 덮어버리는 것보다 이 책 저 책 유랑하며 신선하고 재미있는 독서를 했더니 지루한 느낌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읽은 시간과 양도 비교가 안 될 만큼 차이가 크고요. 덕분에 영상 보는 시간도 대폭 줄고 책 읽는 시간은 훨씬 늘었네요. 저처럼 한 가지에 싫증을 잘 내시거나 책 읽는 게 아무래도 어렵다 하시는 분은 여러 종류의 책을 구비해 놓고 동시다발적으로 읽는 방법도 추천합니다. :)
1월1일부터 독서리스트를 채워보자 마음먹었는데 현재 5칸을 채웠습니다. 뿌듯합니다. 당장 느끼기엔 무리가 있지만 내 지식을 담당하는 뇌의 공간 중 일부가 약간은 채워지고 있는 것 같고요. 2월의 독서리스트에는 몇 칸이 채워질지 무척 기대가 됩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는 의미 없다.
어차피 인생은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인 것을. 그러니 다른 이들과 비교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