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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Jul 17. 2024

멀쩡한 우산 버리신 분?



장마철에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건 곤혹스럽다.


또 쓰레기 글이냐 묻는 독자분들도 계시겠다. 자꾸만 쓰레기에 관한 글만 쓰는 나. 이쯤 되면 쓰레기 관련한 브런치북 연재를 내거나 쓰레기 관련 매거진이라도 하나 파야 할 판이다. ㅎㅎ 하지만 방구석 집순이는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고 그나마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을 차지하니 쓰레기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자꾸 생길 수밖에 없는 점 이해해 주시길 바라며 글을 이어가 본다.  



장마철에 비가 주룩주룩 내리면 가지고 나가야 할 쓰레기도 무거운데 거기에 우산 무게까지 보태야 하니 몸이 더 지친다. 손으로 들 필요 없이 모자처럼 생긴 우산을 누군가 발명해 낸 걸 보긴 했다만 아직은 용기를 내야만 쓸 수 있는 아이템이라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하긴 우의를 입으면 될 일이지만 이래저래 귀찮다. 거기다 음식물쓰레기까지 들고나가야 하는 날에는 더 난감하다. 한 손에는 일반쓰레기, 다른 한 손에는 음식물쓰레기를 들어야 하니 우산을 들 제3의 손이 없다. 손인지 다리인지 여섯 개나 있는 곤충이 부러운 시간이다. 음, 그럼 어쩌나. 그렇다고 장마라는 핑계로 쓰레기와 내내 함께 살 수는 없으니 창 밖을 열심히 쳐다보는 수밖에. 장마철이라고 하루 온종일 비가 오는 건 아닐 테고 소강상태가 되길 기다린다. 비가 잠시 멈췄다 싶으면 잽싸게 우산 없이 나갈 기회를 포착하려는 거다. 마침 비가 멈췄다, 지금이다! 슬리퍼를 후딱 신고 쓰레기 하나씩 양손에 야무지게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는 1층을 눌렀다.


금세 도착한 1층, 이제 막 큼지막한 지붕 같은 건물을 나서려는데 이런! 비가 후드득 떨어진다. 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게 아니라 엄청나게 쏟아지던 비의 양이 적어지니 느낌상 비가 멈춘 것인 줄 내가 착각한 게다. 다시 뒤로 돌아 우산을 가지러 가면 되지만 아무 소득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일은 왠지 짜증이 난다. 어, 근데 방금 스치듯 우산 비슷한 것이 난간에 걸려 있는 것이 보였는데?


다시 돌아보니 오! 우산이 맞다.

누구지?

누가 이 누추한 난간에 이렇게 귀한 장우산을 걸어둔 거지?

버린 건가?

아님 배려인가?


뭐가 됐든 우산 득템이다. 아주 내가 갖겠다는 게 아니라 잠시 빌려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한 손으로 우산을 들어야 하니 음쓰통(음식물쓰레기통)은 구석에 우선 두고 일반쓰레기만 가지고 쓰레기장을 향해 걸었다. 탄탄한 장우산이 내 머리 위에 있으니 아주 든든하고 좋다. 쓰레기를 버리고 다시 음쓰통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음쓰까지 모두 버리고 우산을 접고는 툭툭 힘주어 물기를 털었다. 그리고 아까 우산이 있던 자리인 난간에 다시 고이 걸어두었다.


이렇게 요긴하게 쓸 수 있도록 우산을 둔 사람은 누구일까.

누가 버린 건가? 아니지. 살대 하나 부러진 곳 없이 멀쩡하고 짱짱하던데.

아마도 주야장천 비 오는 날에 혹시 우산이 없어 난감한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 누군가 우산을 걸어둔 것 같다. (아니면 누가 깜빡하고 고 갔는데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다.)


근데 생각해 보니 이 검은색 우산, 꽤 오랫동안 걸려 있던 것 같다.

거의 일주일 가까이 한 곳에 계속 걸려 있었던 기억이 이제야 난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 정말 남의 물건에 손 안대는 건 역대급이다.

사기꾼들만 사기를 안 친다면 차암 살기 좋은 나라가 될 텐데.


누군가 남을 배려하기 위해 놓아둔 우산,

그리고 그 마음을 안다는 듯 우산을 가져가지 않은 이웃 주민들.


이 둘의 콜라보로

오늘 나는 비를 조금도 맞지 않고 잠깐이지만 뽀송한 나들이가 가능했다.


참 감사하다.


조신하게 걸려 있던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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