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물지 않아 눈부신 시절, 감나무 너머 산이 붉게 물들 무렵이면 봉분 위를 굽이굽이 올랐다 고단함을 누여 고단함을 벗은 발자국 따라 고단해질 눈망울로 풀을 뽑았다 그리고 남겨진 땅의 향기를 맡았다 길은 숙명적으로 고단하다 고단함은 바람 소리로 이어진다 너로 걷는 시간이 많을수록 마당 뒤꼍 그늘은 깊어졌다
온기와 냉기 틈새로 사는 숨, 자라지 못해 멈춘 상처는 긴 그림자를 가졌다. 소리마다 자물쇠를 채웠던 적이 있다 존재하는 모든 파동이 결박해 놓은 기억은 깨진 거울처럼 날이 바짝 서 있었다 분리불안에 떠는 강아지의 하울링인 듯 맴도는 밤, 슬픔이 새겨놓은 무늬, 지울수록 견고해지는 저녁에 기댄 겨울이 낡은 문턱을 힘들게 넘는다
화산재가 뒤덮인 곳에서도 꽃은 핀다 입김이 흩어진다 태초의 빛이었을까 봉인된 소리를 여는 살갗의 감촉이 걸음을 다시 내 안에 불러들이고 안부를 물었다 침묵을 깨트리면 시곗바늘이 움직였다 처음을 모르는 꿈은 늘 깨어 있어 앞뒤가 없다 고단한 하루는 익숙해진 생존이다 마지막 풍경은 나에게 아직 곁을 내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