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한과의 면담 후 간호 부장실로 올라간 유정. 문제상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추후 같은 일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확답까지 전달한 후 수술실로 복귀한다. 데스크로 팀원들을 모으고 문제가 되었던 주제에 대해 전달한다.
오늘 전체 인계 할게요.
환자들을 대할 때는 내 감정을 앞세워 말하거나 개인적인 기분을 감정에 싣지 않도록 노력해 줘요.
환자들 말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 언쟁이 시작되면 불리한 건 같이 근무하는 직원들, 타격받는 건 병원 이미지 에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자꾸 문제를 만들려고 하는 환자가 있어도 그 순간 바로 받아치지 말고 시간을 갖고 좀 지난 후에 응대하면 감정이 걸러져서 반응도 부드러워질 수 있으니 이런 방법을 사용해봤으면 해요 모두들.
유정의 전달을 받은 팀원들이 구체적으로 무슨 상황인지 서로 웅성거리며 궁금해하자 지한이 말을 이어간다.
제가... 잠깐 얘기해도 괜찮을까요?
팀원들 시선이 동시에 지한을 향한다.
이번일로 저 때문에 팀 전체 분위기를 흐리는 것 같아서 팀장님과 동료들에게 정말 죄송합니다.
개인적인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환자분들이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을 해서 병동에는 불편을 주었고 저희 팀에는 친절하지 못하다는 말을 듣게 했습니다. 저 하나로 인해 전체를 시끄럽게 한 것 같아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같은 일로 문제를 만들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평소에 사용하는 말투나 행동에서도 개선이 필요한 점이 있다면 조언 부탁드립니다.
지한선생님도 이번일을 계기로 환자들 응대에 더
친절하고 민감하게 반응해 주길 바라고 다른 멤버들도 늘 환자만족과 환자안전을 중심에 두고 업무에 임하도록 해줘요. 오늘 인계는 여기까지, 마칠게요. 하루 모두들 수고했어요.
팀원들이 모두 퇴근하고 나서야 유정은 업무를 마무리하고 탈의실로 들어간다. 쓰고 있던 수술실 모자와 마스크를 벗는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고,
종일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집게핀으로 고정했던
정수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온다.
잠시 의자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종일 답답했던 심장에 깊은 들숨으로 산소를 넣어준다. 집게핀을 빼고 꽉 죄어오던 두피를 마사지하며 천천히 바깥 풍경이 보이는 창으로 시선을 돌린다. 맑은 공기를 단숨에 다시 한번 힘껏 들여 마시고 온몸을 돌게 한 후 입을 닫고 코로 천천히 숨을 내뱉는다.
눈을 감고 여전히 의자에 앉아있는 유정. 퇴근 후 엄마로서 해야 할 일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기에
하루종일 받은 스트레스로 더 피곤하게 느껴지지만 아이와의 통화를 위해 스마트폰을 찾던 그때 마침 울리는 스마트폰 진동울림.
후배 한지한으로 저장된 이름의 수신이다.
팀장님... 저 지한이에요.
응? 무슨 일 있어? 전화까지 하고.
오늘 저 때문에 업무도 밀리고, 마무리하시느라 퇴근도 제시간에 못하시고 정말 죄송합니다.
놀랐잖아! 갑자기 전화하니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죄송하다 이런 말 이제 그만하자. 오늘 얘기할 만큼 했잖아. 앞으로는 안 그러면 되는 거고.
솔직히 경력직으로 입사해서 이런 응대나 태도 문제로 컴플레인 나오게 했다는 게 생각할수록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마음 같아선 얼굴 팔려서 당장 그만두고 싶지만 제 문제점에 대해 팀장님이 방법을 알려주셨고 노력해서 이미지를 좋게 바꾼 다음, 그때는 자신 있게 그만두겠습니다.
이미지 좋아지면 본인을 위해서도 더 다녀야지 왜 관둬~그만두는 건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그건 약속을 지키고 나서 얘기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아.
그렇게 할 수 있지~지한 선생님?
네~팀장님. 오늘 너무 감사합니다.
좋은 말씀도 해주시고 앞으로의 해결 방법의 팁도 주셔서요.
지한이도 이런 문제로 개인적인 아버지와의 문제 털어놓기 쉽지 않았을 텐데 날 믿고 얘기해 주고 내 얘기도 들어주어서 고마워.
팀장님...
오늘 안 바쁘시면 저녁을 제가 사드리고 싶은데
가능할지 여쭤보려고 전화드렸어요
그랬구나~어쩌지?
어린 후배님이 밥을 사준다고 하는데도 못 가네.
워킹맘이라 저녁엔 시간이 노답이라서.
다음엔 미리 약속 잡고 사주기!
이제 나도 가봐야겠어. 너무 늦었네~?
내일 봐요~지한 선생님.
그럼... 알겠습니다~팀장님.
다음엔 꼭 시간 내주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종일 병원에서 마주했던 업무 스트레스를
누군가와 마주하고 풀어놓고 싶었던 유정.
그러나 병원 근처에서, 더군다나 남자 후배와의 사석에서 만남이 그녀를 아는 누군가의 눈엔 좋게 보이지 않을 것이란 걸 알기에 그들의 입과 귀를 즐겁게 할 순 없었다.
병원을 나와 평소 퇴근길 향하던 주차장이 아닌 낯선 골목길로 천천히 걸어가며 통화하는 유정.
미정아~언니야.
회사일이 좀 늦어져서 퇴근 늦을 거 같아.
유한이 저녁 좀 부탁해도 될까? 일 끝나면 들러서 데리고 집으로 갈게.
응~고마워!
같은 아파트 옆동에 살고 있는 여동생에게 아이의 저녁을 부탁하고 아이와 통화를 한다.
싱글맘인 유정이 회식이나 업무로 늦은 퇴근을 할 수밖에 없는 날은 경력이 쌓여 갈수록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부딪치는 싱글맘의 고충,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늘 조마조마한 시간들을 보내야 했고 아이도 불안해했다. 더 이상 아이를 위해서도 이렇게 끌고 가는 건 정서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빠른 방법을 찾은 건 여동생의 집 근처로 이사를 가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여동생 부부의 힘이 컸다.
혼자만의 생각과 고민이었다면 그렇게 빨리 결정하고 이사를 할 수 없었을 텐데 워킹맘, 싱글맘이라는 언니유정의 조건이 동생네 부부에겐 큰 동정표로 작용했을 터였다.
나야~퇴근하는 길인데 오늘 술 한잔이 필요한
날여서. 동생네 유한이 부탁하고 나 혼술가 뜸한 거기 가는 중야. 올 수 있어?
너 안되면 혼자 사케 한잔하고 가지 뭐~연락 줘.
좁은 골목길을 지나 들어가 있는 작은 술집 '사케'.
그 앞에서 발길을 멈춘다. 시끄럽지 않은 공간에서 혼자만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더 간절해 보이는 유정이 가게 안으로 조용히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