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재 중 끌림 09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겨리 Oct 03. 2024

유정의 이야기-3

혼술의 시작 2.

바 테이블에 앉은 유정이 사케와 간단한 안주를 주문한다.

사장은 주방으로 들어가 기본안주와 사케를 병에 담아서 내온다.


감사합니다.


시원한 사케를 잔에 따라서 빈속에 한잔을 먼저 비운다. 사케의 향이 기분 좋게 올라온다.

하루가 이렇게 길었었나 싶게 여러 가지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때 울리는 휴대폰 진동, 친구 철이다.

조용히 혼자이고 싶었던 유정은 받지 않는다.

절친 경이가 참석하는 모임에 한번 나갔다가 만나게 된 동갑내기 남자사람친구이다.

첫날부터 유정에게 적극적인 호감을 보였던 그였지만 지금까지도 그녀는 친구이상의 감정을

보인적이 없다.

울리던 전화는 끊어지고 안주가 뒤이어 나왔다.


맛있게 드세요.


다시 잔을 채우고 두 번째 잔을 비운다.

첫 잔보다 더 달콤한 사케향이 코와 입으로 올라오는 걸 느낀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회식자리를 나왔지만 고기냄새는 온몸을 휘감고 있는 듯하다. 냄새를 코끝에서 지우고 싶어 세 번째 잔을 이어서 비운다. 사시미 한 점을 생고추냉이 얹고 간장에 찍은 후 입안에 넣는다. 글거리던 속이 생고추냉이의 알싸한 향과 맛으로 달래진다.

다시 울리는 휴대폰의 진동. 이번엔 친구 경이다.

 

유정아, 퇴근했어? 집야?


퇴근은 했어. 근데 집은 아니고.


병원, 집, 병원, 집순이가  집 안 가고 오늘은 어딜?


혼자 조용히 한잔하고 싶어서 여기 회사 근처 어디쯤~ 사케 마시는 중야. 처음 와본 곳인데 꽤

 취향. 조용하고 아담하고 생각 정리하기 딱 좋은 곳인 듯해.


혼술을 한다고? 무슨 일야~무슨 일 있구나.

나 오늘 그 모임 있어서 왔다가 철이 만났어.

좀 전에 너한테 전화했는데 안 받는다고 하길래

내가 해 본거야. 둘이 그쪽으로 넘어갈까?


아냐, 다음에 봐.

여러 일로 머리가 뒤죽박죽야.

이런 마음으로 만나면 나 엄청 징징거리고 치대고

울 것 같아. 강한 유정로 보여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잖아. 다음에 너랑만 따로 보자.

철이는 즐거울 때만 만날 수 있는 남사친으로 남겨 두고 싶어. 그 이상의 의미를 두고 싶진 않아.

무슨 말인지 알지?


그래도 친구가 혼술을 한다는데 그냥 두니~

나라도 잠깐 갈게.


너도 모임인데 여기까지 오려고, 됐어.

다음에 보자, 끊는다!


시간이 흐르고 있지만 손님이 없는 가게.

조용한 음악을 함께 듣고 있는 가게주인과 유정.


사장님, 제가 이 동네 주민은 아니지만 회사가 근처예요. 오늘 회식이 있었는데 복잡한 일도 있고 해서 조용한 곳에서 혼자 한잔하고 싶었는데

골목길을 돌다 보니까 간판이 보여서 들어왔어요.

안 바쁘시면 제 얘기 좀 들어주실래요?


사케알코올이 적당히 그녀의 기분을 끌어 올린다.


제가 즐거운 회식날, 보기 좋게 승진에서 퇴짜를 맞았어요. 사장님이 제가 남자가 아닌 여자라서 사회생활을 치열하게 못하는 조건이라나요?

맞아요. 전 아직 아이가 어려서 회사일에만 올인할 수 없어요. 더군다나 사장은 모르지만 전 돌싱에 싱글맘에 워킹맘이니까 사회생활하기에 안 좋은 조건은 다 갖춘 셈이죠.

그런 만큼 정신없이 지금까지 티 안 내고 일하고 아이 키워가며 지내왔는데 결국 돌아온 건 실망뿐이었어요. 사장이 부담해야 할 득실을 따졌을 때 어떤 선택을 할지는 이미 답이 나와있었던 거죠. 그럼에도 희망고문했다는 게 기분이 나빠. 그럼 부장자리가 공석일 때 왜 를 불러서 굳이 부장으로 승진 고민 좀 해보라는 말을 했는지. 원장이 극한 개인주의자인걸 알면서도 저는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요? 저를 부장으로 승진을 시키면 저희 팀에 구멍이 생긴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 테고 그런 부담스러운 선택을 할 사장이 어디 있겠어요. 전 아이를 위해 지금까지 살아있었던 거고, 살아왔고, 살아가야 하기에 승진에서 선택을 못 받은 건 직장에서의 기회를 놓친 것 일뿐 제 개인의 일로 봤을 땐 아이를 위해 오히려 잘된 일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려고요.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혼자서 술집에 온 것도 처음, 술 한잔도 처음이라

어색할 줄 알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내 문제에만 집중할 수 있고 옆사람 기분 신경 안 써도 되고

종종 들러서 혼자 시간 보내기 좋을 것 같아요.

오늘 사장님께선 저에게 큰 선물을 주셨어요.

혼자서 이 가게와 사장님을 차지하고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저야말로 혼술 손님을 만나게 돼서 행운이죠.

개인적인 깊은 얘기를 저에게 해주신 것도 제가 감사하고요. 사회생활이 쌓이다 보면 그만큼 스트레스도 많아지지만 털어놓게 되는 사람은 한정적이니까요. 특히나 손님은 혼자서 아이를 키우고 일하고 그 스트레스가 상당할 것 같아요.

저는 들어줄 귀만 있고 말하는 입은 닫혀있으니

언제든 저의 귀가 필요할 땐 들르세요.


감사합니다. 좋은 친구를 만난 듯해요.


조용히 마지막잔을 따라주는 사장님, 막잔을 비우는 유정.


그렇게 '사케'사장님과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