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끌어당긴 것들-1
가스라이팅의 결과는 지금의 나.
내 아이 둘의 아빠와는
97년 첫 만남부터
6년간의 연애 후,
결혼까지 이어졌다.
지난 시간 돌이켜 보면
그가 나를 가스라이팅 했다고 밖에는.
무직에 경제적 무능, 주식중독, 외도, 거짓, 신용 불량자임을 연애와 동거로 이미 다 알고도 감히 결혼까지. 아이를 원치 않던 난, 아이가 없어서 그가 정신줄 놓고 사는 건 아닌지 나 스스로에게서 문제를 찾았다.
그가 아이만 있으면 정신 차리고 살겠다고 했던 거짓말에 또 가스라이팅당한 결과였고
모든 문제가 정상으로 돌아올 거라는 그의 말에 또 휘둘린 것이었다.
내가 그를 떠나 혼자 살아갈 수 없다고 끊임없이 심어 주었다.
그 결과 첫 아이인 딸을 낳았고 아들이 있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그의 말에 둘째 아이까지 낳았다 둘째가 태어나던 날도 그는 술자리를 하고 있다가 불려 와 아들이지? 낳은 딸아이가 옆에 누워있는데도 아니야 잘못 본 거야 아들일 거야라던.
아들 없이 딸만 둘이어서 결혼생활 중에도 밖으로만 돈다던 남편의 핑계 아닌 가스라이팅에 난 고된 독박육아로 하루하루 찌들어갔다.
달라서 시작할 수 있었고, 하나가 되고 싶었나 보다,
그땐 그러고 싶었나 보다. 그러했기에 가능했을 일이었다.
사회생활을 인천에서 처음시작했다.
엄마는 다 큰 여자사람을 혼자두기 위험하다며
몇 해 소식도 모르던
안산 외삼촌 집에서 통근하기를 원하셨다.
출근을 앞두고 짐 몇 개 챙겨서
삼촌 집으로 들어갔다. 방 두 개인 작은 빌라.
삼촌은 여전히 무뚝뚝하고 잔소리 많아 보이는 얼굴로 서 계셨다. 더 놀란 건 평소 내가 알고 있던 외숙모가 아닌 처음 보는 얼굴의 여자가 삼촌 옆에. 새 외숙모라며 외삼촌이 소개를 시켜 주었다.
외숙모라 하기엔 나와 겨우 20살 차이도 안되어 보이는 언니 같은 분위기.
그런데 신기하게도 말투가, 외삼촌뻘 되는 여자와 대화하듯 서로가 닮아있다.
큰 방 하나는 두 분이서 사용을 했고, 겨우 몸하나 누일 수 있는 좁디좁은 어둡고 작은방, 그곳이 내방이 되었다.
빌라들 사이 일층 집, 빛도 바람도 만나기 어려웠던 그곳.
안산이 인천과 가깝다고... 했다. 시골에서만 자란 나와 엄마는 도시에서의 가깝다 기준을 몰랐다.
엄마도 삼촌이 가깝다 얘기하셨으니 그런가 보다 하셨을 테다. 아침 6시 40분까지의 출근시간을 맞추려면 5시에 일어나 서둘러 씻고 준비, 안산 선부동에서 첫 버스를 타고 인천 만수동에 내려 구월동까지 가는 버스로 한번 더 갈아타야 했다.
지방 작은 마을에서 올라오니
지리적인 조건도 위치도 아무것도 모른 채
엄마가 원하시던 데로 따를 수밖에 없었던 나.
거의 일 년 동안 이 먼 거리를 통근했다.
삼촌집은 그대로 또 편치 않았다.
개인택시하던 삼촌.
평소왕래가 전혀 없었던 터라
말하는 것도 불편했지만
같은 좁은 공간에
한집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이래라저래라 간섭도 참견도 그렇지만
특히나 의아했던 건
이런 나이 든 삼촌이 뭐가 좋아서
저 어린 여자는 내 외숙모행세를 하며
나이 든 삼촌에 맞추려 일부러
나이 들어 보이는 말투와 표정을 연습하는 건가?
라는 20대 초반였던때 나의 의구심.
그분들은 나를 위한다고
먹을 것, 쉴 곳, 조언(잔소리, 참견)등
챙겨주셨을 테지만
난 오직 벗어나고 싶었다.
삼촌얘기만 듣고
그럼 거기서 출퇴근하자 라던
엄마는 이런 상황을 모르셨을 테지.
다 감수하고 지내야 해.
자취할 수 있는 방을 구할
돈을 모을 때까지는.
돈이 없어 자취집도 못 해줬다는
미안함을 삼촌네 지내는 걸로
위안 삼고 계신 엄마를 위해.
딸이 이런 마음으로 지낸다 하는 걸 알면 안 되게 고스란히 홀로 짐을 업었다.
이렇게라도 내가 삼촌 집에 있어야
엄마 마음이 편할 수 있을 테니 비록 불편하고 몸은 힘이 들어도 독립할 수 있는 자본금을 모을 때까지는 참고 견뎌야 한다고 나를 조였다.
입사 후 6개월 만에
지방에 본가로 내려갔다.
아무 일 없이 잘 지내는 것처럼
엄마아빠에게
평소딸의 모습처럼 주말을 보냈다.
일요일아침 인천으로 귀가하려는데
오빠친구가 주말에 낚시하고 놀다
자기도 서울이 집이라 가는 길에
데려다주겠단다. 그렇게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차비 아끼자는 마음으로 그 사람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내 인생이 지하로 내리 꽂히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였다.
나를 안산에 내려주고 그는 서울로 갔다.
휴대폰이 없던 그 시절
연락처 주고받는 것이 쉽지 않은 때였다.
그렇게 첫 만남은 지나갔고
한 달이 지날 무렵
회사로 전화를 걸어와 나를 찾던 그.
그 사람과 나는 결이 달랐다.
그는 항상 즉흥적이고 즐겁고 에너지가 넘쳤으며
급한 것, 근심걱정 없는 태평한 사람으로 유머 있고 술과 친구, 바깥세계를 좋아했다.
난 계획적이고 신중하고 작은 걱정거리도 많은,
누군가를 만나는 시간보다 혼자 있는 나만의 공간에서 책을 읽고 배우는 걸 좋아하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달랐기 때문일까
끌렸다. 아니 끌려가고 싶어 졌고 다른 것들이 궁금했다.
내가 지내오던 환경과 다른 곳에서 그와 낯선 사람들과의 경험에 설레었다.
나에게 없던 그의 장점만 보였고 그런 나를
그는 리드했다. 난 그런 그를 따라가기 바빴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안산집 근처로
인천직장 근처로 그는 어디든 나를 픽업해 주었다.
난 세상을 참 몰랐다.
어디든 날 위해 오고 가는 그의 열정만 보았지
그럴 시간이 많은 젊은 남자가 직장이 없고 직업이 없다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니.
사업을 해서 개인시간이 많다며 둘러 대는 그의 말에
사업은 당연히 자본금이 있어야 하니 기본적인 재정상태는 갖추고 있는 남자인 줄 혼자 착각했다.
자기차도 있고 사업도 하고 개인 시간도 많고.
그 모든 걸 좋게만 본 거다, 순진하게도.
그 큰 결함을 못 본 거였다.
자주 만나다 보니
나의 연애를 삼촌이 알고
그 사람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삼촌은 택시를 하시던 분이라
사람경험이 많아서였을까?
그 사람에 대한 내가 아는 이런저런 몇 마디만
했을 뿐인데
"그 사람은 결혼하기에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엄마걱정하실까 얘기는 안 하겠지만 적당히 만나다 정리해라"
삼촌이 뭘 안다고.
그 사람 만나보지도 않았으면서,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정리해라?
평소 좋지 않던 감정에
반항심이 더 한 듯 보란 듯이 더 만나고 다니고
집에도 안 들어가기까지 20대의 반항이었다.
결국 엄마가 알게 되셨다.
"어디 만날 사람이 없어서
네 오빠 친구를 만나고 다녀.
니오빠 사고 치고 다니다 중학교도 졸업 못하고
제대로 된 친구가 없는 거 알면서
어떻게 네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사람을!?"
평소 조용하고 말씀 없던
늘 내편이셨던 아빠도
그 사람을 인사차 데려갔을 때
집에도 안 들이셨다. 들어가려 하자
몽둥이를 허공에 휘두르기까지 하셨다.
내가 태어나
엄마아빠를 거스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 처음이 내 인생을 살아오면서
처음인 것들을 많이 경험하고 후회하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들로 통곡하는 시간들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
이런 일들로
더 이상 삼촌집에 얹혀 있을 수 없어
그가 직접 작은 빌라를 전세로 얻어주어
회사 근처로
독립, 이사하게 되었다.
그토록 바라던 독립 아닌 동거.
또 다른 구속의 시작이었다.
함께 있을수록
그의 사생활이 포장 없이 보이기 시작했다.
차며 집이며 모두 대출에다가
대출 못 갚아 빚독촉 전화문자가 하루에도 몇 번씩
사업자금으로 써서 돈이 좀 모자라 그런다며
곧 해결하겠단 거짓말의 연속.
늘 헛구름만 잡는듯한 그의 말들.
인테리어 하다가 공장건설을 해야겠다며
어느 날 즉흥적으로 내뱉은 말이
그의 어머니집 담보로 큰 공사를 하기에 이르렀다.
건설회사를 시작하면서
결국 난 그와의 결혼을 선택했고
사람 볼 줄 아는 눈이 없던 내가
그를 선택한 것과 같이
자석처럼 안 좋은 일들만 들러붙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알지 못한 분야에
즉흥적으로 뛰어들다 보니
잘 될 일이 아니었고
결국 담보로 잡힌 본가집도 은행으로 넘어가고 빚도 못 갚아 도망자로 살기 시작했다.
혼인신고를 안 하고 살았기에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벌이로 생활을 했다.
신용불량자로 전락해
은행통장카드거래를 할 수 없다 보니
내 명의로 된 카드핸드폰등을 사용하게 되었다.
드문드문 인테리어일을 하면서 또 사람들을 만나고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이 많아졌고
외도, 도박, 주식, 폭력, 강압, 협박까지.
사람이 해선 안될 것까지 다하며 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어디서 용기가 난 걸까.
외도를 알고
주식에 마르지 않게 돈이 들어가는
자금을 대어주고
그런 그 사람에게 무슨 희망을 보고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고
끌려 다녔을까.
2002년부터
우리의 시작은 동거와 사실혼이었지만
큰아이가 태어나면서 결국 혼인신고와 출생신고가 함께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