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짐과 만남.
일상으로 돌아온 유정은 여느 날과 다르지 않게 지내고 있는 듯하다. 생각지 못했던 그의 거짓과 배신으로 여지없이 단호하게 떠나보낸 그날,
그와 함께했던 1년이라는 시간을 모두 묻어 버렸다.
더는 흔들림 없을 것 같았던 그날의 감정들은 시간이 흘러 옅어지기 시작한 후에야 그가 켜켜이 일상에 스며들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퇴근할 때면 회사 근처에서 늘 기다리고 있던 그를 만나러 가던 길,
출근하는 날이면 늘 통화하며 걷던 길,
집 근처 함께 자주 걷던 공원을 이젠 홀로 산책할 때,
자주 가던 카페를 이젠 혼자서 가야 할 때,
단골식당을 이젠 의도적으로 피하게 될 때,
그의 안부를 물어올까 친구들도 만나지 않을 때.
그는 없지만 그를 떠오르게 하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처음 표출되었던 분노와 화는 아득한 그리움으로
포장이 되어 가는 듯했다.
그와 헤어진 후 1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을 즘
그날도 늘 같은 퇴근길 중 하루였다.
집 앞 버스정류장에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 모퉁이 길. 벚꽃나무가 골목 양길가로 빼곡하다.
봄비가 온 다음날 이어서였을까,
벚꽃나무에 꽃이 떨어지고 여리한 초록색 잎이 올라오고 있는 걸 보며 유정은 잠시 생각한다,
지금까지 봄이라는 계절은 그녀에게 만남과 헤어짐, 기쁨과 슬픔, 동시에 시작과 끝이라는 아픔을 주었음을.
그때, 등 뒤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 그 자리엔 예전보다 야위고 푸릇한 턱수염으로 까칠한 모습의 재훈이 서있다.
"유정아,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잘 지냈어.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야? 날 만나러 여기까지 온건 아니길 바래."
"가끔 묻는 전화도 문자도 한 번을 답이 없니. 연락을 할 방법이 없어서 회사 근처, 집 앞을 셀 수 없이 왔다 가 그냥 가곤 했어, 지난 헤어진 시간 동안."
"그럴 이유 없었잖아. 다른 여자가 생겼는데 오빠는 거짓말만 했고 날 기만하며 배신했기 때문에 우린 헤어진 거였어.
근데 이제 와서 왜? 무슨 할 말이 더 있어서?"
"나 너랑 헤어지고 후회 많이 했어. 그렇게 상황을 만든 건 다 내 잘못이었으니까. 내게 설명할 기회도 , 더 이상 말을 들어주지도, 믿지도 않는 너를 보면서 변명보다 이 상황을 정리하고 보여주자. 그럼 너도 다시 날 만나줄 거라 믿었어."
"어떻게 그 여자와의 관계만 정리하면 내가 당연하게 받아줄 거란 생각을 할 수 있어? 얼마나 멘탈이 강하면 오빠만을 중심에 두고 그런 생각과 결론을 내릴 수 있는지 난 이해할 수 없어."
"유정아, 우리 헤어지고 일 년이 지났어. 나 많이 반성했고 그 일도 다 정리했어. 잘했다는 건 아니야.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안 되겠니?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관계에서 나의 생각이 상대방의 생각과 다를 수 있구나라는 걸 알았고 앞으로는 오해 생기지 않도록 확실하게 선을 그을게."
"이미 그 얘긴 늦었어. 일 년 전 그 일로 난 오빠에 대한 신뢰, 믿음,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
"오히려 이젠 기대가 없으니까 생각을 바꿔서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 나 정말 너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일 년이란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매일이 고통스러웠어. 너를 만날 수 없다는 거, 너를 볼 수 없다는 거,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거, 너를 만질 수 없다는 거, 함께할 네가 더 이상 없다는 거.
정말미안해.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나 이렇게는 널 보낼 수 없어."
"왜 오빠만 힘들었다, 지금도 힘들다고 해? 난, 그렇게 헤어지고 난, 편하고 좋았을 것 같아? 지난 일 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생각, 고민 없이 오빠를 깨끗이 잊어버리고 지냈을 것 같냐고!"
그때, 유정의 팔을 끌어당긴 재훈은 그녀의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고 두 팔로 부드럽게 끌어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