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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끌림 26화

유정과 지한이야기-9

새로운 감정

by 겨리

유정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따듯한 햇살을 느끼며 눈을 떴다.

어제의 술기운이 아직도 남아있는 듯 머리가 조금 무거웠다. 천천히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한다. 커피머신에 물을 채우고 머그컵을 올려놓으며 버튼을 누른다. 원두가 분쇄되면서 고소한 커피 향이 집안에 가득 찬다. 커피가 컵에 채워지는 동안 어젯밤 일이 떠오른다.

직장 근처에서 혼술 하며 알게 된 단골사케집에 갔다가 만나게 된 후배 지한. 함께 앉아서 사케잔을 여러 번 부딪치며 그와 나누었던 대화들. 유정을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던 그. 그녀의 차를 대리기사가 운전할 때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조용히 유정의 손을 잡았던 그. 집 앞까지 왔을 때 들어가기 아쉽지 않냐며 물어오던 그였다.

그의 웃음, 낮은 목소리, 어둠 속에서도 그녀를 바라보던 반짝이던 눈동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같은 직장에서 수없이 마주쳤던 후배일 뿐이었는데...

어제 사케집에서 그와 마주쳤던 눈빛은 직장에서 본 적 없었던 새로움이었다. 나이차이가 20살이나 나고 이혼 후 아이를 혼자 키우는 워킹맘이지만, 지한 앞에서는 묘하게 긴장되는 느낌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잠시 설레는 감정을 느끼는 게 어쩐지 부끄러웠다.

어젯밤, 지한이 집 앞까지 바래다주던 순간이 떠올랐다. 가로등 아래서 지한이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벌써 들어가기... 아쉽지 않으세요 팀장님?" 유정은 그 말에 잠시 망설였다. 팀장과 팀원, 그리고 나이차까지.

분명한 경계가 있지만 마음 한편에서 더 오래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잠깐만 더 있다 갈래?"

결국, 편의점에 들러 맥주캔 2개를 사 온 지한은 벤치에 앉아 유정에게 맥주캔 뚜껑을 따서 건넨다.

"팀장님, 저는 맥주 안 좋아해요. 물 마시는 것처럼 배불러서요. 그런데 지금은 얘만 한 게 없네요." 하며 맥주캔을 들어 유정이 들고 있던 캔에 가볍게 부딪치고 둘은 기분 좋게 한 모금씩 마신다.

가볍게 부딪치는 캔의 소리가 밤공기에 울리고 알코올이 입 안을 적시며 살짝의 용기를 더해준다.

어색한 침묵 속, 서로의 숨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듯한 순간. 유정은 슬며시 지한의 옆모습을 살핀다.

지한이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치자 유정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어두운 가로등아래 겹치는 순간, 아무 말 없이도 묘한 떨림이 전해진다.

"이렇게 같이 앉아 있으니까 좀 낯설지 않아요, 팀장님?"

지한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유정은 잠시 할 말을 잃고 캔을 꼭 쥐었다. 낯선 건 사실이었다.

그동안 알던 지한과는 다른 모습, 어딘가 부드럽고 다정한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 감정이 어디로 향할지, 유정은 아직 자신이 없었다. 나이차이, 직장 내 위치, 그리고 아이... 이모 든 것이 그녀를 망설이게 했다.

"그래도 나쁘진 않네, 오늘처럼 가끔 이런 것도."

그 짧은 대화 속에서도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한층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의 여운은 밝은 아침에서도 유정을 놓아주지 않았다.

따듯한 커피로 가득 찬 머그컵을 들고 테이블에 앉은 유정은 휴대폰의 메시지 알림이 온 것을 확인하며

어젯밤의 숙취와 아침을 깨우는 커피 한 모금을 천천히 마신다. 화면에는 지한의 카톡이 떠있고 내용을 확인한 순간 가슴이 뛰었다.

"일어났어요? 출근길에 해장용 아이스아메리카노 마시려고요. 팀장님은 어떤 거 드세요? 테이크아웃 해갈게요"라며 스마일 이모티콘도 함께 보내왔다.

"응, 난 디카페인 아이스로 부탁해. 고맙고. 어제 늦게 잤을 텐데 안 피곤 해?"

"전 팀장님이 걱정되는데. 괜찮으세요? 먼저 출근해서 커피는 팀장님 텀블러에 담아 둘게요. 이따가 봬요"

유정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뭔가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오늘 출근해서의 하루가 예전과는 다를 것 같은 묘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이 옳았음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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