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마지막 부분을 꼭 읽어주세요.
“아니. 나도 감당이 안된다고 이제. 진짜로...”
차마 자존심 때문에 돈이 없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내가 자존심이 상해야 할 일인가?
흙수저의 기준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개인적으로 나의 기준은 ‘내가 집에 돈을 보내주지 않으면 생활이 되지 않는 것’이다.
보통 자녀가 부모에게서 경제적 독립을 하는데, 반대로 부모가 자녀로부터 경제적 독립을 하지 못한 상황인 것이다.
생각만 해도 깝깝하다. 이걸 실제로 겪어보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참 다양한 감정이 든다.
남자분들은 한 번에 공감하실 수 있을 것 같다. 화생방 해보셨는가? 그 화생방을 약한 강도지만 10년 넘게 계속하고 있는 느낌이다.
조심스럽지만, 여성분들은 성스럽지만 매우 신경 쓰이고 아픈 마법의 고통이 약한 강도로 계속 지속되고 있는 느낌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가장 정확한 비유는 ‘남은 시간이 표시되지 않는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느낌’ 일 것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언제 도움 요청이 들어올지 모르니.
암튼 그냥 더럽게 짜증 나고 신경 쓰이고, 가슴이 답답하고 뭐 그런 감정이다.
폭탄이 이번에‘도’ 터졌다. 벌써 몇 번째인지. 도대체 내가 돈을 벌고, 보내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전에는 가정경제가 어떻게 돌아갈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다. 돈 문제만 터지면 자연스럽게 나만 찾는다. 그들의 능력, 인맥 범위 안에서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즐겨 보는 유튜브 채널에 나와 비슷한 고민의 사연을 본다. 상담의 결론은 ‘부모님께 도움을 드리지 마라. 그럴수록 가난이 이어진다. 가슴 아프고, 냉정하게 느껴지겠지만 지원을 하지 말고 그들이 일을 해결하게 하라.‘
맞다. 맞는 말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죄송하지만 상담해 주시는 분은 그런 상황에 놓여봤는지가 의문스럽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지만‘과 같은 접속사로 반전시킬 수 있는 상황, 감정이 아니다.
이번에도 내가 졌다. 나는 멍청하게도(?) 도움을 드렸다. 아니 도움을 강요받았다고 하는 게 정확하려나. 그 돈을 모으기 위한 시간과 노력을 빼앗겼다고 하는 게 맞겠다.
속이 메슥거린다. 오랜만에 느끼는 토가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다. 왜 맨날 나인지. 다른 사람은 없는 건지. 아니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는 부끄러운 건지. 또다시 돌고 돌아 그래서 나밖에 없는 건지. 생각과 감정이 빙글빙글 돈다.
세탁기 거름망에는 세탁 시에 소화하지 못하는 동전이나 큰 이물질들이 모인다. 세탁기가 이물질들을 억지로 소화시키려고 하면, 호스가 막혀버리거나 기계에 손상이 가고 탈이 난다.
그래서 애초에 소화할 수 없는 것들은 억지로 하지 않도록 만든 것이다.
기계를 설계할 때도 생각하는 것을,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왜 ‘그냥 버텨’라고 생각만 하며 스스로를 더 힘들게 했을까 싶기도 하다.
내게도 이런 거름망이 필요했다. 아니 지금도 필요하다. 기어이 터져버린 시한폭탄으로 인한 상처와 울분을 모아서 담아 놓을 수 있는 거름망. 일상을 살아가면서는 도저히 소화해 낼 수 없는 감정들을 따로 담아둘 수 있는 거름망이.
모든 것을 소화하려고 애쓰지 말자. 그러다 정말 탈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