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 세탁을 돌리다가 든 생각
“이불은 이불 코스로 돌려야 한다고? 진짜? 바람막이는 기능성 의류 코스로 해야 하는 거고?”
세탁기에 빨래 코스가 다양하게 있다는 것을, 직접 빨래를 돌리기 시작한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표준’으로만 세탁기를 돌리면 되는 줄 알았다.
아니, 그것만 눌러야 하는 줄 알았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려나. ‘세탁기에 쓰지도 않는 버튼이 왜 이렇게 많은 거지?’ 생각했으니까.
아빠가, 때로는 엄마가 빨래를 돌릴 때 다른 코스로 설정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아빠 엄마는 오로지 ‘표준’만 눌렀다. 마치 그게 만능 버튼인 것처럼.
세탁기에는 세탁물의 재질과 종류에 따라 세탁 코스를 선택하는 기능이 있다. 이불은 이불 코스,
아기옷은 아기옷 코스, 란제리와 울은 란제리/울 코스처럼.
상황에 따라서도 설정이 가능하다. 시간이 없을 때나 가볍게 세탁하고 싶을 때는 ‘스피드 워시’, 소리가 크게 나면 안 되는 경우에는 ‘조용조용’으로.
그런데 사람들은 이 기능들을 다 사용하시는지 모르겠다. 나는 다 사용하지 않는다. 아니 하나만 쓴다고 해야 정확하겠다. 그냥 애매하면 ‘표준’으로 설정하고 돌리니까.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 ‘표준 버튼’은 모든 세탁을 가능하게 하는 ‘만능 버튼’이었으니까. 또 신기하게도 웬만하면 대부분의 빨래가 큰 이상 없이 잘 되어 나온다. 물론 이런 나를 보고 답답해하는 사람도 많지만.
가끔 생각해 본다. 삶을 살아가는 데에도 이런 만능 버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너무나도 다양한 조건, 환경, 상황들을 마주하지 않는가. 빨래 돌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중에서도 특히,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얽혀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불처럼 포근한 사람, 아기옷처럼 여린 사람, 란제리나 울처럼 예민한 사람, 스피드 워시처럼 조급한 사람, 조용조용 모드처럼 조용하며 자신의 속을 내비치지 않는 사람 등등.
빨랫감에 따라 코스를 조정하듯이, 우리는 만나는 사람에 따라, 자리에 따라 내 모드를 조정한다. 그렇게 지낸다. 그렇게 살아간다.
근데,
그래서,
피곤하다.
애매하고 답답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딱 그때 ‘생각 없이 믿고’ 누를 수 있는 버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치 세탁기의 ‘표준‘ 버튼처럼.
아, 불가능하려나. 표준적인 사람이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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