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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 May 29. 2024

굳은 땅 위로 흙을 덮는다

매일 같은 작은 발작과 몇 번의 큰 발작을 뒤로하고 훈련소를 수료한 나는 자대에 들어갔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사회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훨씬 열악한 환경임에도 훈련소에 비하면 훨씬 나아져서 그런지 발작은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생활관 옆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우며 담 너머의 바깥을 바라보고 있으면, 정말 여기에서 나가기만 하면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래서 더욱 애타게 언젠가 꿈을 이룰 날들을 상상하고 간절히 바랐다.


훈련소에서 시작된 독서는 계속 이어졌다. 책을 읽는 건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이었고 그래서 더욱 매달렸는지도 모른다. 일 년 반 동안 백 권이 훨씬 넘는 책을 읽었다. 책을 읽으며 내가 하던 생각은 언제나 단 하나, 나도 언젠가 이런 책을 쓸 것이라는 다짐뿐이었다.


상병 때쯤 전군을 대상으로 했던 병영문학상에 수필로 입상하기도 했다. ‘흐르는 모든 건 바다에 닿는다’그때 쓴 글의 제목이다. 그 글은 거짓투성이였다. 듣기 좋은 말들을 늘어놓고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적었다. 그 글 안엔 내가 없었다. 언젠간 이런 글이 아닌 진짜 내가 쓴 글을 써야지, 언젠간 진짜 내 글로 성공해야지, 그런 다짐을 했다.


일 년 반은 길었다. 매일마다 같은 다짐을 반복하고, 책을 읽으며 미래의 자신을 상상해도, 당장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답답했다. 나는 날고 싶었다. 새장 속 새의 날갯짓은 하늘로 닫지 못한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날갯짓을 멈추지 않았다. 그건 희망이었을까, 아니면 미련이었을까. 일 년 반을 지내고 나면 자유롭게 날아오르자. 나는 또 다짐을 할 뿐이었다.


전역을 앞두고 브런치스토리를 시작했다. 그동안 써왔던 글도, 상상했던 주제들도 많았기에 이제는 정말 본격적으로 꿈을 이뤄보고 싶었다. 일단은 써보고 싶은 걸 전부 써보자. 그리고 전역을 하면 정말로 책을 한 권 써보자. 이제는 정말 내 이름으로 책을 내자. 거듭된 다짐이 쌓이고 쌓여 마지막으로 했던 다짐.


돌아보면 군대에서의 일 년 반은 정말 다짐의 연속이었다. 그때의 내가 애타게 바랐던 건 지금 이 순간이겠지. 그게 지금 내가 글을 쓰는 이유. 내가 살아갈 이유. 오늘의 내가 일 년 반 동안 기다렸던 순간의 나라는 걸 잊지 말자. 수백 수천 번 반복했던 다짐을 결코 잊지 말자. 다짐 위로 다시 다짐을 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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