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를 따질 수 없는 일이 있지.
한 때 안 좋은 일이 작정이라도 한 듯 들이닥치던 때가 있었다. 정말 맘 먹고 괴롭히려는 것 마냥.
계획되지 않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것이 갑자기 길을 가로막을 때 난 당황하고 가차없이 흔들리는데 그 때도 역시 난 여지없이 괴로워 했다.
영국에서 살고 있던 나는 친구에게 전화해 엉엉 울면서 끝에 꼭 덧붙이던 말이
"아니, 왜 도대체 계속 이런 일이 일어나는거냐고.
하나 끝났더니 하나 생기고 이제 좀 괜찮아질까 싶었더니 또 저쪽에서 터지고."
급기야는 내가 뭘 잘못했나 란 생각에까지 이르러서 난 그 전의 과오들을 곱씹어보기도 했다.
그래, 내가 전남자친구한테 좀 못되게 굴긴 했지, 그래서 내가 지금 벌 받는건가보다.
그래, 내가 좀 이기적으로 굴었던 적이 있었지. 그래서 지금 이렇게 외로운 건가보다.
전 남자친구가 많이 하던 말은 Karma 였다. 우리나라 말로 치면 업보, 자업자득 같은 의미.
너가 한 건 결국 다 너에게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고.
그땐 내 탓으로 돌려서라도 이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일만한 납득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코엔 형제는 꽤 단호하게 말한다.
아니다, 그런 일들은 '그냥' 일어난다. 가끔은, 아니 어쩌면 자주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일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어떤 것이라고.
물리학 교수인 래리 고프닉은 곧 종신재직권 심사까지 앞둔, 누가 보면 그럴 듯한 삶을 사는
평범한 가장이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 악재가 보란 듯이 연달아 터진다.
보기만 해도 내가 힘들고 지칠만큼의, 감당 못할만큼의 무게로 시시각각 닥치는 불행.
가족은 누가 봐도 콩가루 집안에, 아내는 자신의 친구와 바람이 나 이혼을 요구하고
자신의 수업을 듣는 학생이 F학점을 줬다는 이유로 점수의 시정을 요구하며 돈을 던지고 가는데
그걸 받아들이지 않자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하지 않나, 래리의 종신재직권을 반대하는 편지들을
몇개 받았다는 말까지 듣게 된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의 건강 하나는 문제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고 없이 훅 하고 다가오는 불행들을 도무지 그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의 삶 저변에 넓게 자리하고 있는 물리학의 기반은 수학. 수학은 명확하고 확실한 공식이 있고
이를 잘 풀어나가면 한가지의 답이 나오는데 정작 그가 사는 삶이 그러지 않으니 미치겠는 노릇인 거다.
거기다 그는 착하게 살았는데. 나름 시리어스(serious)하게, 성실하게 살았는데,
착하게 살면 착한 결과가 나올 거라는 믿음을 번번이 배반하듯 흘러가는 그의 삶이 그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코엔 형제의 <시리어스 맨>에선 왜 이런 악재가 터졌는지에 관한 거대한 서사가 뒤에 자리하고 있는 뻔한 영화가 아니다.
다만,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라고. 이유는 없다고 말할 뿐.
미스터리를 그냥, 받아들여라.
유태인인 래리는 이 일들을 이해할 수 없어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해결책이라도 찾아가보려고 랍비들을 찾아가지만 랍비들도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단지 얼렁뚱땅한 얘기를 하는 것 만 같지만 사실 그 안엔 코엔형제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들이 숨겨져있다. 너의 인식을 변화시키라고.
이러이러해서 이렇게 됐다. 라는 인과론적인 인식을 잠깐 내려놓으면 받아들일 수 있고
어떤 일에 뭔가 큰 의미가 있는 것도, 메시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일어나는 거다.
인과론은 결코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리고 역시나 좋은 일 또한 갑자기 찾아온다.
영화 후반부에 가선 절대 해결되지 않을 것 같던 일들이 조금씩 구름이 걷히듯 해결되는데,
이혼을 결심했던 아내가 그에게 사과를 하고 종신재직권을 못 딸 것 같다고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래리에게 심사를 통과했다는 기쁜 소식까지.
나쁜 일의 연속이었으니 종신재직권도 못 딸거야 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래리를 비롯한
우리들에게 코엔 형제는 또 한번 외치는 셈이다.
"아니라고 했잖아, 그런거. 일어 날 일은 일어나고 안 일어날 일은 안 일어나."
그래도 이제 래리의 인생이 조금은 해결되나 싶어 마음의 불편함이 조금은 거두어졌을 때, 갑자기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영화 초반 그가 건강 검진을 받은 의사로부터 걸려온 전화지만,..
왠지 그의 말투가 심상치 않다.
저번 검사로 할 말이 있다고. 그리고 우린 또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건강은 그나마 좋다고 생각했던 래리였는데 이제 일이 좀 풀려가려고 하니까 갑자기 건강이 안좋다고
하려는건가 싶어서.
하지만 코엔형제의 메시지에 따르면 우린 판단할 수 없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역시, 영화는 그 전화가 어떤 전화였는지에 관해 알려주지 않은 채 끝난다.
아직 난 그렇게 초연할 수 있을만큼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코엔 형제의 메시지를 잘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리고 물론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것 또한 진리임에 믿어 의심치 않고.
하지만 코엔 형제의 메시지는 '그래도'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또 한번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닥쳐와도 한번 쯤 되짚어 볼 수 있는 그들의 메시지.
그냥 그런 일은 일어난다, 그를 설명할 정확한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괜찮다. 삶은 이런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