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수요일 내방가사 사무실에 모이는 회원들은 자체적으로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어 점심을 먹는다. 이때 나물 반찬을 모두 책임지고 있다는 정진연 회원은 41년생 올해로 83세이다. 2천 년 60세부터 내방가사 전승보존회에서 활동했고 부회장이란 감투도 썼다. 채소 농사를 짓는 그는 이때부터 나물을 반찬으로 공급했다. 2011년 제15회 전국 내방가사 경창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고, 이듬해인 제16회 때도 우수상을 받았다. 전라남도 담양 등 전국 경창 대회에 참가해 좋은 성적을 얻었다.
내방가사 '나의 소회가'를 읽고 있는 정진연 ⓒ이호영
정진연의 고향은 영양군 청기면 토곡리다. ‘흙티마을’이라고 불린 이 동네는 6.25 전쟁 때도 피해가 없을 정도로 안전한 곳이었다. 너무 깊숙한 골짜기여서 그런지 인민군이 들어오지도 않았다 한다. 한때 60여 가구가 살았지만 국민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종숙 어른, 재종, 종고모, 정진연 일가 등 5가구만 남았다. 이 마을은 신기하게도 하천에서 따뜻한 물이 솟았다. 겨울에는 김이 모락모락 났다. 맨손으로 빨래를 해도 손이 시리지 않았다. 물론 여름에는 물이 시원해 바다나 계곡 등으로 피서를 가지 않아도 좋았다.
정진연 내방가사 '나의 소회가' 원문 ⓒ이호영
“어화세상 벗님네요 저의소회 들어보소
여자인생 사는법은 세상여성 일반이다
대복소곱 차이난다 이몸의 출생지는
경북영양 청기면에 토곡리라 영일정씨
포은선생 십구대손 이내몸이 출생하여
초가삼간 단정한데 양친부모 우리형제
다복하게 살아갈 때...
<정진연 내방가사 ‘나의 소회가’>
정진연은 청기국민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교가를 지금도 외우고 있다. 54살 때 처음으로 초등학교 동창회를 갔더니 노래를 부르라고 해서 “노래를 아는 게 없고 교가를 부르겠다”라며 교가를 불렀다. 50년 만에 처음이지만 1절에 이어 2절까지 불렀다. 그 이듬해 동창회 관계자가 현재 교가를 다 아는 사람이 선배밖에 없다며 전화로 다 알려달라고 해서 불러 주었다.
정진연의 외우는 실력은 내방가사에서 잘 드러난다. 삼촌이 지어준 ‘오륜가’는 물론 자신이 지은 ‘나의 소회가’, ‘한양가’, ‘한양 500년가’ 등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운다. 내방가사 공부방을 찾은 연구자들이 정진연에게 가사를 읽어보라고 하면 앞에 든 내방가사 원고는 보지 않고 사람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낭랑한 목소리로 낭송을 한다. “아니, 할머니 다 외우고 계시네요.?” 하면 어릴 때부터 기억력이 좋은 데다 가사 내용이 자신들의 이야기라서 그런지 외우기가 쉽다고 대답한다.
정진연의 내방가사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 궁벽한 시골의 가난한 살림이라 어머니는 밤낮없이 일을 했다. 낮에는 밭일에 온종일 시달리고도 밤에는 목화솜에서 실을 뽑아서 베틀에 앉아 베를 짰다. 어머니는 고단한 노동을 잊기 위해 가사를 입으로 읊조렸다. 정진연은 이때 어머니가 불렀던 가사가 ‘오륜가’였을 거라고 한다. 오륜가 중에서도 부모에 대한 효심을 강조하는 대목을 즐겨 불렀다. 옛 우리 어머니들이 그랬듯이 부모 공경을 가장 으뜸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정진연의 외할머니도 가사를 잘 지었다. 어머니는 ‘계녀가’를 물려받아 외우고 필사했다. 정진연의 내방가사는 아마도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이어받은 것 같다.
정잔연이 4세 때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됐다. 가난했지만 가족을 소중하게 생각하던 아버지는 12세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평소 위장이 약했는데 결국 속앓이 끝에 세 모녀만 남기고 저세상으로 떠났다.
“배고프면 밥을 주고 목마를때 물을주고
깊은산골 찾아가서 산딸기와 머루다래
정원에 삼색과일 정결하게 따가지고
고방속에 감춰두고 배고플까 염려하여
일식삼식 먹여키워 십이세에 다다르니
교훈예절 언문글을 자자획획 가르칠때
숱한응석 다부리고 철없이 살아갈 때”
<정진연 내방가사 ‘나의 소회가’>
8세에 입학한 청기국민학교를 14세에 졸업하고 학교는 더 다니지 못했다. 정진연은 친구들과 함께 일월산 자락에 있는 학교를 걸어 다녔다. 외우는 실력은 국민학교에서도 빛을 발휘했다. 1학년 학예회 때 다른 친구가 개회사를 하기로 돼 있었으나 그 친구가 암기하지 못하자 개회사를 모두 외우고 있었던 정진연이 개회사를 멋지게 했다고 한다.
정진연은 ‘자미도’란 종교를 믿었는데 같은 종교를 믿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그녀의 나이 25살, 신랑 배운환은 27살로 2살 차이였다. 하지만 가난한 살림은 시집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정진연은 자기 가정뿐만 아니라 맏동서가 일찍 사망하면서 큰집 살림까지도 도맡았다. 정진연은 시부모와 남편, 자녀 그리고 시숙, 그 가족과 함께하면서 두 가정을 책임졌다. 남편은 착했으나 술을 좋아했다. 실질적인 가장이 된 정진연은 남의 땅을 빌려 배추, 무 등 채소 농사를 지었다. 판매도 시장에 가서 직접 팔았다. 밤늦게까지 손수레를 끌고 식당을 다니며 채소를 팔았다. 채소 장사를 하며 집을 마련했다. 정진연의 고단했던 인생사는 내방가사 ‘나의 소회가’에 고스란히 담겼다.
정진연 내방가사 '나의 소회가' ⓒ이호영
“불효한 이소생이 이십오세 당년되니
동서로 혼담오니 흥해배씨 금역당
명문귀댁 성인군자 천정배필 연분되어
백여리 먼먼길에 교자에 실여앉아
곰곰이 생각하니 가엽하신 우리엄마
누굴믿고 살아갈고 눈물흘려 피가되네
구택에 입문하니 유법이 훌륭하고
구고님의 많은자애 열자부가 다받을까
생활은 빈곤하나 인품이 후덕하니
부모님께 효도하고 일천동기 우애하며
그럭저럭 가는세월 사오년 얼푼가고
가운이 불행한가 맏동서는 수일을
편찬드니 병세가 위독하여 세상을
떠나시니 어린조카 삼남매를 제가책임
져야하니 이런망극 또있는가..... ”
<정진연 내방가사 ‘나의 소회가’>
이선자 회장과 만남은 정진연의 내방가사 가슴에 불을 지폈다. 가슴 한편에 자리 잡고 있던 어머니의 가사 소리와 외할머니의 가사가 다시 정진연의 가슴과 머리를 들뜨게 했다.
제4회 내방가사 경창 대회 때 친정에 있던 ‘오륜가’를 들고 갔다. 다 해진 두루마리를 뜯어서 새로 편집한 끝에 발표를 무사히 마쳤다. 이때부터 부회장이 돼 지금까지 부회장을 이어오고 있다.
정진연 내방가사 '오륜가' ⓒ이호영
“어와세상 벗님네들 이내말씀 들어보소
천지지간 만물중에 오직인생 최귀하다
인이예지 품수타서 인생마다 자졌건만
물복이 교체하여 아는이 몇몇인고
삼강오륜 팔조목을 대략품어 읽으리라
이내몸이 어데난고 부자유친 으뜸이요
하늘같은 우리부모 생이육지 생각하면
십각태중 조심하여 삼년유양 고생할제
엄동설한 방이차면 품안에다 넣고자고
삼복염천 더운날은 부체질에 잠을재고
젓문자리 바뀌가며 말은자리 골라뉘며
밥상받고 똥물쳐도 더러운줄 모르던가
<정진연 내방가사 ‘오륜가’>
정진연은 매주 수요일만 되면 점심 식사 때 쓸 나물을 이선자 회장에게 보낸다. 20년째 나물을 공급하고 있다. 채소 밭고랑 3개는 내방가사 보존회용이라고 한다. 회원들은 이 나물로 비빔밥을 만들어 점심을 맛있게 먹는다. 외부 손님이 와도 회원들과 함께 나물 비빔밥을 먹는다. 다른 반찬이 없어도 맛있다.
정진연은 가사를 외우고 낭송을 잘한다. 2011년 제15회 전국내방가사 경창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때 가사는 ‘구제역귀가’다. 구제역은 2010년부터 2011년까지 안동을 비롯해 우리나라 전역에서 발병했다. 많은 소와 돼지 등이 죽었다. 농가 피해가 많았다. ‘구제역귀가’는 이때 상황을 가슴 절절히 담았다. 2012년에는 삼촌이 지은 가사 ‘오륜가’로 우수상을 받았다.
정진연은 사 남매를 낳았지만 위로 자식 둘을 잃었다. 딸 하나, 아들 하나 남매는 어려운 형편에도 바르게 자랐다. 비록 예순이 넘어서 시작했으나 내방가사는 정진연의 인생 여정에 동반자가 되고 있다. 내방가사 사무실에서 만나는 여성들은 정진연과 같은 삶을 산 동반자이다. 고단했던 농촌 생활은 물론 어려운 시집살이를 이겨내고 자식을 잘 건사한 인생의 동지들이다. 정진연은 좋은 친구들과 함께 가사를 쓰고 읽으면서 남은 인생을 살고파 한다. 내방가사는 그녀의 삶이 되고 있다.
출처:한국국학진흥원 기획 '안동문화 100선'. 이호영. 『어와 벗님네들』. 안동내방가사이야기. 민속원.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