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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강물처럼 Nov 02. 2023

홍천단풍 단상


온 산하가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가는 가을입니다. 수은 온도계는 기온이 오를 때 빨간색 수은주가 위로 올라갑니다. 한반도의 단풍은 수은 온도계를 뒤집어 놓은 듯, 10월 중하순부터 기온이 낮은 북쪽에서 기온이 높은 남으로 남으로 붉게 물들어 내려갑니다. 쌩초보 농군이 봄농사와 여름농사를 힘겹게 마무리하고 가을농사로 배추와 무만 심어 놓은 터라 닷새마다 물 주고 보름마다 약치고 남는 시간에 한 달에 한두 번씩 2박 3일로 여행을 다니고 있습니다. 9월에는 강원도 양구와 충청남도 보령, 10월에는 영남 알프스의 신불산 간월재 억새평원과 강원도 홍천을 다녀왔습니다. 11월에는 철원 연천 파주를 다녀올 참입니다.


2023년 10월 25일 떠난 2박 3일의 홍천여행. 마지막 바위암벽 구간에 철계단이 없었다면 범접할 수 없었을 가리산 등산, 구절양장 속에 들어앉은 삼둔마을(생둔, 살둔, 미둔), 홍천강 발원지인 미약골, 실론약수(삼봉약수), 공작산 수타사. 이름이 이쁘지 않은 데 없고 골골 산산 아름답지 않은 데 없는 홍천입니다.


홍천의 한자는 '洪川(큰 물: 홍 / 내: 천)'입니다. 현재의 홍천이라는 지명은 고구려 때부터 이 지역을 흐르던 '홍천'이라는 하천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홍천강은 길이가 143㎞에 달하며 북한강의 제1지류가 됩니다. 홍천군 서석면 생곡리 미약골산에서 미약하게 시작한 내촌천이 두촌면 남쪽에 이르러서는 장남천과 어깨동무를 하고 남서쪽으로 흐르다가 야시대천, 풍천천, 덕치천 이  강, 저 강, 또 저 강과 함께 어울려 강강강수월래를 돕니다. 홍천읍을 지나 서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오안천, 성동천, 어룡천, 중방천을 만나 제법 강다운 강이 되어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과 강원도 춘천시 남면 관천리 경계에서 북한강으로 흘러듭니다. 산이 높으니 골도 깊고 골이 깊으니 심산유곡을 흐르는 내가 많습니다. 그래서  '큰 물 흐르는 하천'이라는 뜻을 가진 지명, 홍천이 된 모양입니다.


그러나 가을의 홍천을 찾은 외지인인 나에게 홍천은 '洪川'이 아니라 '紅天(붉을: 홍 / 하늘: 천)'입니다. 산이 높고 나무도 높은데, 단풍이 든 나무를 쳐다보니 단풍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바로 붉은 하늘 '홍천'입니다.  태백준령 넘어 영서지방의 '철양춘홍화(철원 양구 춘천 홍천 화천)'는 비슷한 시기에 한 덩어리로 무리 지어 단풍이 드니 '한반도 민화투판'의 '풍시마(풍약)'하는 지역이 된 것 같습니다.


잘 물든 단풍이 봄꽃보다 더 아름답다고 합니다. 저절로 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봄꽃은 심고 가꾸어야 합니다. 단풍은 알아서 저절로 물이 드니 더 화려하고 더 큰 꽃입니다. 그러나 단풍은 사람 눈에는 곱지만 안타깝게도 단풍 드는 것은 나뭇잎에 일어나는 노화현상입니다. 가을이 되어 기온이 떨어지고 찬바람이 불면 나무는 스스로 월동준비에 들어갑니다. 차가운 대기와 맞서기보다는 겨울을 나기 위해 나무는 가지와 잎으로 보내던 물과 영양 보급을 중단하고 잎에 있던 영양소들을 뿌리로 불러 모아들입니다. 이 과정에서 잎의 엽록소가 파괴되어 엽록소에 의해 가려졌던 색소들이 나타나거나, 잎이 시들면서 잎 속의 물질들이 다른 색소로 바뀌면서 단풍이 드는 겁니다. 죽기 전에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는 백조처럼 나뭇잎도 낙엽이 되기 전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띠게 됩니다.   


눈으로 보기에도 그러하지만 곱게 물든 단풍은 곱게 나이 든 초로의 노인과 다르지 않습니다. 소담한 봄꽃으로 짙푸른 녹음으로 한 시절을 보내고 난 후, 자연의 섭리를 알아 관조와 달관의 자세로 삶을 마무리할 단계에 다다른 고운 노인의 모습은 잘 물든 단풍과 같습니다. 흰머리카락이 늘어날 때에 '머리에 서리가 내렸다'라고 하는 시적 표현처럼 곱게 나이 든 사람에게 하는  '얼굴에 단풍 들다'라는 말도 참 아름다운 표현이 될 것 같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은 '남자 나이 사십이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했고 '여자 나이 사십은 두 번째 스물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앞에 살았던 시기를 거울삼고 발판 삼아 새로운 두 번째 시기를  맞는 일은 새로이 거듭나는 일입니다. 과연 가을은 모든 잎이 꽃이 되는 두 번째 봄입니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보노라니 이런 대목이 있었습니다. 30대 중반의 미혼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장성한 아들이 빨리 제 짝을 찾아서 독립하여 집에서 나가기를 원하는데 아들은 그럴 생각이 도무지 없으니 어머니는 안타깝습니다. 스님은 당장에 독립시키라 말합니다. 짝이 없더라도 지금 당장에 말입니다. 밥 해주고 빨래해 주는 엄마가 곁에 있으니 얼마나 편하고 좋겠는가. 집에서 나가서 살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집을 나가서 혼자 살아봐야 정신이 번쩍 들어서 외로움도 느끼고 밥 해 먹고 빨래하는 게 힘들다는 걸 안다는 겁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야 일할 필요성도 느낄 것이라 말합니다. 자식의 인생에 아름다운 단풍을 피게 하라는 말인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해주든 지원을 모두 끊어야 자식은 자신의 단풍색깔이 붉은색인지 노란색인지 갈색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위대한 예술가일지라도 누구나 반드시 '모방'의 시기를 거치게 됩니다. 습작기는 모방의 시기입니다. 모방의 시기를 거치면서 자기 특유의 창작의 기법을 찾아냅니다. 예술 세계 또한 나뭇잎이 단풍 드는 원리를 모방한 듯합니다. 모방의 대상이 되는 걸출한 예술가의 흉내를 끝까지 내고 산다면 그는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없습니다. 모방이라는 지원이 끊기면 금방은 갈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겠지만 그러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창조해 내게 됩니다. 모창 가수들이 있습니다. 생계수단으로 모창을 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만 엄격히 말하면 그들은 '모창 가수'가 아니라 '가수 모창인'들입니다. 가수들은 자신만의 창법을 가진 에술인들이지만 가수 모창인들은 가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단풍의 시기를 지나면 이제 나뭇잎이 나무를 떠나야 할 시기가 옵니다.  화려한 단풍은 아름다움 속에 낙엽의 운명을 안고 있어서 '백조의 울음'처럼 더욱 아름답습니다. 슈베르트의 연가곡 <백조의 노래>는 그의 유작을 모아서 꾸린 천재의 마지막 울음이어서 더욱 처연한 아름다움을 갖는 것 같습니다. 낙엽은 그냥 죽은 나뭇잎이 아니라 낙화암 절벽에서 사비수로 몸을 던진 백제의 삼천궁녀입니다.


이형기 시인은 시 낙화(落花)에서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노래했습니다. '낙엽귀근(落葉歸根)'이란 말은 단풍의 시기를 지나면 나뭇잎들은 나무를 떠날 때가 되어 스스로 땅에 떨어집니다. 뿌리로 돌아가 이듬해 봄, 새 생명의 태동을 위한 밑거름이 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밀알은 하나일 뿐이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성서의 말씀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낙엽은 '파괴와 창조의 순환적 자연법칙'을 충실히 따릅니다.




짧은 2박 3일이었지만 홍천의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홍천전통5일장에서 올챙이국수와 홍총떡(홍천 메밀 총떡)을 먹어본 것으로 여행일정을 마무리했습니다. 꼭 다시 오고 싶은 홍천입니다. 저절로 노래가 흥얼거려집니다. 오 나의 전우여~ 오 나의 전우여~ 이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오면 내 너를 찾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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