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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편선 Sep 28. 2023

비워야 채워지는 책장


내 친구 정미는 종종 자신의 책꽂이에서 이런저런 책들을 골라 내게 선물하곤 했다. 

책 선물은 무조건 받고 보는 나는 너무 좋았지만 고개가 갸웃거려지곤 했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꽤 많은 책읽기를 하는 정미가 어떻게 자신의 책을 아무렇지 않게 내어줄 수 있는지.

내게 정미는 참으로 이상한 친구였다. 



중학생 때는 집에 굴러다니는 책들을 읽다가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용돈으로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자취 생활을 하던 내게 라면 몇 개, 휴지 몇 롤, 연탄 몇 장이 더 필요한 물건이었지만 나는 이것보다 책이 더 먼저였다. 

이렇게 사 모으기 시작한 책은 자취방의 작은 책꽂이를 다 채웠고 옆에 쌓이기까지 했다. 여러 번의 이사를 다니면서 시골집에 가져다 두기도 했지만 꾸역꾸역 싸들고 다닌 책이 더 많았다. 


17~8년 전 지하실이 있는 주택이 살 때였다.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 마당에 물이 꽉 찼다. 배수로가 막혔던 모양이다. 마당의 물이 흘러넘쳐 결국 지하실까지 물이 들어찼다. 

지하실에는 방에 들이지 못한 책과 잡동사니가 있었다. 고모네서 양수기를 빌려다가 물을 빼고 보니 물건들은 다 쓸 수 없었고, 책도 다 버려야할 상황이었다.



너무 속상했다. 당분간 볼 일이 없을 것 같아 묶어서 내려두었던 전공서적들이며 장편소설들 그리고 대학 때 내내 끼고 다녔던 자전까지…….

그 속상함과 허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팔 한 짝 정도는 떼어놓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내 책의 꽤 많은 분량을 원하지 않게 정리했다. 아니 정리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 권 두 권 늘어난 책.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나의 책장과 책은 집의 주인 역할을 했다. 


남편이 쓰러지고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나는 이전의 살림을 다 비웠다. 

작은 방 한 쪽에 꼭 필요한 물건을 쌓아두고 업체를 불러 나머지를 다 정리해달라고 했다. 

세탁기, 냉장고, 서랍장 두 개, 내 옷, 콩이(반려견)랑 도도(반려묘) 용품 정도만 남겼다. 

무지개 다리 건너간 지 십 년이 되도록 버리지 못한  우리 초롱이의 옷이랑 장난감이며 남편의 옷가지며, 침대며 화장대 그리고 왜 이제까지 싸들고 있었는지 궁금한 자질구레한 작은 소품까지 다 버렸다. 


이때서야 알 수 있었다. 내 친구 정미의 마음을.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다는 것을.

버리려고만 하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버리고나니 나도, 삶도 홀가분해졌다. 

정미는 어쩌면 책을 비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자신의 욕심을 비운 것이리라.

그 비워진 자리에 사람을 채웠으리라.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온 지 4년이 넘었다. 

어느 새 다시금 살림이 늘었다. 이런저런 공부를 시작하면서 책도 점점 늘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비워야 채워진다는 것을.

그리고 할 수 있다. 

여전히 쉽지 않지만, 

여전히 힘겹지만

책장을 비우고, 내 삶의 무게를 덜어내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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