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e you ready?

by 술술

화요일 오후 2시. 충전기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휴대폰, 아이패드, 무선 키보드와 이어폰의 케이블을 뽑는다. 기계들이 ‘띠링’ 소리를 내며 순간적으로 ‘반짝’이더니 이내 어두워진다. 배터리 80% 정도. 마치, 내가 그들의 생명 연장선이라도 뽑은 듯 미안해진다. 어쩔 수 없다. 지금 나서야 글쓰기 모임에 늦지 않는다.

집에서 5호선 양평역까지 걸어서 10분. 양평역에서 광화문역까지 11 정거장, 20분. 광화문역에서 서촌 책방까지 20분. 1시간 남짓, 나는 보통 팟캐스트를 듣는다. 음악, 책, 영어, 교양 프로그램 중 그날의 컨디션과 분위기에 맞춰 고른다.

지하철에서는 주로 책 소개, 작가 인터뷰를 듣는다. 혼자만의 워밍업이랄까. 수영선수 박태환이 경기에 들어가기 전에 헤드셋을 쓰고 음악을 듣는 것과 비슷하다. 나에게 ‘글의 세계’에 들어갈 준비를 시키는 것이다. 글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으며 ‘글 근육’을 말랑말랑하게 만든다. 글쓰기 모임에서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말할 준비, 나의 글에 대해 듣고 쓸 준비를 하는 것이다.

오늘 지하철에서 들으려고 아껴둔 플레이리스트는 YES24의 팟캐스트 ‘책읽아웃’에서 진행한 이연 님의 인터뷰다. 이연 님은 그림 유튜버로 최근 ‘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이라는 첫 책을 출간했다. 그 기념으로 종종 인터뷰를 하시는데 나는 이연 님의 그림만큼이나 말을 좋아하기 때문에 즐겨 듣는다. 정확하게는 이연 님의 언어, 사유하는 방식을 좋아하는데 이번 책은 그림 자체보다 그림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 말하는 듯했고 그래서 좋았다. 한쪽 손에 눈속임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다른 손으로 마술을 하는 마술사처럼, ‘그림’으로 시선을 끌지만 정말 얘기하고 싶은 속내는 ‘겁’ 아니었을까. (언젠가는 내가 이연님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써보고 싶다.)

인터뷰에서 이연 님은 겁내면서 창작을 하는 모든 창작자(자신을 포함하여)와 삶이 두려운 사람들에게 작은 용기를 주고 싶어 책을 썼다고 했다. 그리고 제목에 ‘그림’ 대신 그 어떤 것도 넣을 수 있다고 하셨다. ‘겁내지 않고 ○○하는 법.’ 지금 나에겐 ‘겁내지 않고 계속 글 쓰는 법’ 일 수 있겠다. 나는 지난번 제출한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수선한 내 마음이 초라했고 너무 날 것이라 부끄러웠다. 글쓰기가 겁났고, 오늘 모임이 겁났다. 이연 님의 이야기는 엄마의 옷자락 같았다. 나는 어릴 때 낯선 곳에 가면 엄마 옷을 잡고 곁에 붙어있었다. 모르는 어른들이 가득한 결혼식장에서, 등교 첫날 교실 앞에서 엄마 옷자락 ‘한 꼬집’이면 든든했다. 어떤 것도 무섭지 않았다.

광화문역에서 책방까지 걸어갈 때는 주로 클래식을 듣는다. 광화문 앞에서 국립 고궁박물관을 끼고 오른쪽으로 들어가다 작은 성문(경복궁 영추문) 즈음에서 건널목을 건너 골목으로 들어간다. 고궁, 갤러리, 이색적인 카페와 소품 가게, 오래되거나 새로 지은 한옥 그리고 클래식. 나는 마치 여러 시대와 국적을 통과하고 있는 것 같다. 각기 다른 것들이 제멋대로 모여있는데 묘하게 멋스러운 균형감이 느껴진다. 이런 매력 때문에 이 동네를 소위 ‘힙하다’고 하는 걸까.


* 힙-하다(hip 하다) : 순서 변경

「형용사」 원래 '힙은' 허리와 다리가 만나는 지점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형용사로 쓰이며 고유한 개성과 감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최신 유행에 밝고 신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규범 표기는 미확정이다. (출처 : 우리말 샘 사전 )

나는 이 힙함이 좋아서 시간이 걸림에도 광화문에서 버스를 타지 않고 일부러 걷는다. 발걸음마다 코로 서촌의 공기가 들어오고 눈에는 서촌의 풍경이 가득하고 귀에는 클래식이 들린다. 온몸으로 힙한 서촌을 통과하고 나면 왠지 괜찮은 생각이 떠오를 것만 같다.


책방이 보인다. 책방 문은 활짝 열려 있고, 안에 두 사람이 보인다. 나는 이연님의 옷자락을 잡고 서촌의 힙함을 잔뜩 묻힌 채 글의 세계로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책방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선다. 당신은 어떤 세계의 앞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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