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글 쓰는 사람’을 생각하면 며칠이고 홀로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불 켜지 않은 방에 책상 위 노트북 화면만 번쩍인다. 노트북에서 내뿜는 불빛은 단숨에 내 시력을 떨어뜨릴 것처럼 공격적이고 그 옆에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커피잔 탑이 아슬아슬하게 쌓여있다. 그리고 바닥에는 쓰다 버린 종이가 신경질적으로 구겨져 여기저기 널브러져 마치 지뢰밭 같다. 영화랑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탓일까. 암튼, 글쓰기는 꽤 외롭고 고독한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스스로 외롭고 고독해질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괜찮은 글을 쓸 수 있는가 보다 싶었다.
이런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면서부터다. 나는 지난해 처음으로 글쓰기 모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모임에서 첫 글을 쓰고 올해 두 번째, 새로운 글쓰기 모임에 다니고 있다. 일부러 글쓰기 모임을 찾은 이유는 ‘함께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내 글들은 다른 길로 향하고 전혀 다른 결말을 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시작은 혼자 쓰지만, 마침표는 같이 찍는 기분이 든다. 언젠가는 글쓰기 모임의 경험담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빼먹지 말아야지 마음먹었다.
최근 글과 관련된 모임을 주제로 하는 책들이 출간되었다. 이슬아 작가님의 ‘부지런한 사랑’과 김소영 작가님의 ‘어린이라는 세계’. 이 책들은 글쓰기 수업, 독서 교실에서 선생님과 학생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는데, 나는 학생으로서 학생들의 이야기를 적고 싶었다. 사실, 이 주제는 모임의 마지막 글로 쓰려고 했다. 합평할 때, 이 글은 공교롭게도 말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를 부끄럽게 만들 것 같아 미룬 것이다. 그런데도, 적게 된 것은 오늘 모임의 여운을 잊기 전에 글로 옮기고 싶어서다.
오늘은 처음으로 온라인으로 만났다. 아침부터 날이 흐려 불안했는데, 곧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며칠 내내 주구장창 맑다가 하필, 오늘 비람.’ 외출 준비가 번거로운 마음이 드는 찰나 작가님께서 오늘은 온라인에서 보자고 제안하셨다. 비가 와서 평소보다 서둘러야겠다 싶었는데, 오히려 여유가 생겨 신랑과 집 앞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사 왔다. 약속 시각 10분 전. 안방 화장대 위에 노트북과 커피를 올려놓고, 화면에 보일 수도 있는 지저분한 것들은 옆에 밀어둔다. 어차피 나는 상반신만 보이니까, 잠옷에서 윗옷만 갈아입는다. 아나운서들이 위에만 정장을 입고, 아래는 트레이닝 바지를 입는다던데, 마치 뉴스 데스크에 앉은 기분이다. 시각이 되자, 노트북 화면에 익숙한 얼굴이 하나둘 뜬다. 6명에 맞춰 노트북 화면에 네모난 칸이 2열씩 3줄로 만들어진다. 각 칸에 각자의 공간과 얼굴이 보인다. 마치, 모두 같은 빌라에 사는 사람들 같다. 101호, 102호, 201호, 202호…. 집에 있는 모습들이 낯설면서도 왠지 조금 편해 보이기도 한다. 어색한 인사 후, 하던 대로 서로의 글에 의견을 더한다.
나는 적어둔 메모를 살핀다. 신기한 것은 모임이 거듭될수록 메모 양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1~2줄 정도의 짧은 감상평 정도였는데 오늘은 밑줄, 빨간색, 파란색 무슨 필기 노트처럼 요란하다. 무슨 할 말이 이렇게 많은지…. 집에 있으면 신랑이 퇴근하기 전까지 말 한마디 안 하는 날도 많은데 메모만 보면 난 상당한 수다쟁이임이 분명했다.
내가 점점 수다쟁이가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회차가 지날수록 글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에 있다. 유독, 이번 글이 그랬다. 누구 할 것 없이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는데,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는지 다들 이번 글이 가장 좋았다고 했다. 뭐라 설명하긴 어렵지만 내 느낌대로 말하자면 조금 더 그 사람다웠다. 나는 누군가의 글을 읽는 건 그 사람의 세계와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더욱 그렇다. 그런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의 세계가 내 세계에 와서 부딪치고 나의 기억, 생각들과 공명한다. 누군가의 글 안에 내 가족도 있고, 과거의 나도 있다. 그래서 나의 합평은 대부분 “○○님의 글을 보니, ○○이 떠올랐어요.”로 시작한다. 비슷하면 비슷한 대로 다르면 다른 데로 내 안에서 부대낀다. 그런 것들이 내 속에서 충돌하다 새로운 글의 영감이 되기도 하고, 써놓은 글을 바꿔버리기도 한다.
내가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서로에게 ‘누군가’가 되어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 참여자분이 쓴 엄마와의 에피소드를 합평하고 있었다. 그 글을 쓴 분은 30대 여성으로 자신의 시점, 즉 딸의 시선으로 썼고 나는 그 글을 보며 나의 엄마와 아빠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60대 여성 참여자분이 합평할 차례.
“○○님의 어머니 마음은 제가 조금 알 것 같아요. 저희 딸이 30대니까, 제가 어머니 나이와 비슷할 것 같은데...”
그 한마디에 마음이 울렁거렸다. 노트북 화면에 있는 얼굴을 하나하나 다시 본다. 모임에 작가님 1명과 5명의 참여자가 있는데, 참여자는 모두 여성이다. 20대, 30대, 50대, 60대. ‘우리 엄마가 올해 몇이더라. 나에게 동생이 있다면, 언니가 있다면 딱 저 나이 때겠다.’ 합평을 들으면 마치 언니가 해주는 말인 듯, 엄마가 해주는 말인 듯했는데 그래서였구나. 그들은 내 동생이 되고, 언니가 되고, 엄마도 되는 것이다. 나는 가끔, 당사자에게 전하지 못할 말들을 글로 남기기도 하는데, 합평을 들으면 마치 대답을 들은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래서 그 말에 말을 전할 용기가 생기기도 하고, 혹은 굳이 전하지 않아도 이대로도 괜찮은 기분을 느낀다.
그렇게 나는 누군가의 말에 글을 바꾸기도 하고, 마음을 바꾸기도 한다. 오늘 누군가 내 글을 읽으면 ‘함께 길을 걷는 것 같다.’라고 했다. 나는 글쓰기 모임에 가는 길을 적곤 하기에 내 글에는 모두에게 익숙한 풍경이 나오는 까닭이겠지만, 나는 그 말이 참 좋다. 모임을 거듭하고 나누는 글이 쌓일수록 함께 걷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눈빛을 주고받으며 보폭을 맞추듯, 말을 주고받으며 글을 써나간다. 따로 또 같이.
그리고 이제는 서로의 글을 궁금해하고 기다리기도 한다. 요즘 월간 윤종신, 일간 이슬아 등 정기적으로 콘텐츠를 만들어 제공하는 구독 서비스가 유행인데, 우리는 매주 1편의 글을 나누고 있으니 ‘주간 서촌 책방’쯤 되려나. 우리 각자는 작가이면서 서로의 구독자인 셈이다. 오늘은 누군가 나의 글감을 걱정해주기도 했다. “미화 씨, 오늘 온라인 모임이라 다음 글은 어떡해요.” 사실 온라인으로 봐서 좋기도 했지만, 순간 오늘 밖에 안 나가면 다음에 뭘 쓰지 싶었었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왠지 웃음도 나고 걱정해주는 기분이 꽤 반가웠다.
그나저나 구독 서비스의 묘미는 마감기한을 아슬아슬하게 지키는 건데, 이미 마감기한은 지난 것 같다. 이런, 난 구독 서비스 작가는 못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