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작가는 행복한 글을 써야 한다.

송신 : 2018 - 수신 : 2024

by 초제

가족을 떠나보내고,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


마음속에서 젓갈만치 삭아가던 사산아가 보이지 않는다.


성불이라도 했나.


음-. 그럴지도 모르겠다.


*


내가 식물을 전공하게 된 건 혹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2021년의 나는 폐인이었다.


실패한 꿈을 껴안은 채 놓지 못하던.

죽은 아기를 껴안은 어리석은 여자와 같았다.


그때 내가 쓴 글의 제목이 <구피 두 마리>였다.


지난번 글에서 한 차례 언급했듯 그건 폭력으로 점철된 글이었다.




사랑이 아닌 것으로 아기를 밴 여자가 기어이 그 자식을 사랑하고 마는, 정신병 걸린 놈이 쓴 것만 같은 이야기.




거의 4년이 다 되어가는 글이다. 사실 다 쓴 것도 아니고. 와중에 신춘문예 때는 다른 단편 글 써서 냈다.


그런데 말이다. 내가 그때 그리고 아직도 그 글을 써내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왜냐?


우선, 나는 남자다. 남정네란 말이다.

그러니 여자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고작 스무 살짜리가 임신한 여자의 마음을 도대체 어떻게 알았겠나. 주인공의 심정이 아니라 자꾸 내 감정이 쓰이더라. 그래서 힘들었다. 어디 물어볼 곳도 없고.


"원치 않게 임신한 여자의 마음은 어떨까?"


이걸 문학적으로 토론할 사람이 주변에 없었다. 있다 해도 만약 저런 질문을 했다간 인간관계가 힘들어졌을 게다.


다음으로 사실 줄거리 자체가 글러먹었기 때문이다. 주인공 '유리'는 그 아기를 원망했다.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제 뱃속의 아기에게 쏟았다.

결말에 다다라서야 제 아기를 사랑하는 데에 성공했다.


근데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다, 유리는 그 아기를 미워한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었단 말이다.


왜냐면, 그건 나의 꿈이었으니까.

아기는 꿈이다. 메타포다. 상징이다. 은유다.


꿈을 이루는 데 실패하고만,

방구석 폐인이 되어 싸구려 시각매체에 경도되어 하루하루를 휘발성 강한 도파민에서 허우적거리던,


그런 한심하고도 비참했던 스무 살의 내가 고등학생 시절의 꿈을 소재로 쓴 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때 그 와중에도 내 꿈을 원망한 적이 없었단 말이다.


그러니 뱃속의 아기를 원망하는 여자를 쓰는 것은 일기장에 거짓말을 쓰는 것처럼 쉽지 않았다.


나는 내 꿈을 사랑했다.

실패했을 때, 나는 미안했지 미워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그때 그 꿈을 꾼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루려고 발악한다. 그래서 군대에서 새벽에 잠도 안 자고 모포 뒤집어쓴 채 영단어를 외운 거겠지. 그렇게 수능치고 전역한 거 아니냐고. 기필코 꿈을 이루고자 말이다. 이 멍청아.


*


사산아는 어디로 갔나.


장례를 치르면서,

아버지를 용서하고,

기말고사를 망치고,

새 글을 쓰는 와중.

아니지. 쓰지 못한 것을 다시 쓰는 거지.


그 와중에 말이다.

어디로 갔는가-.


혹시-.


실패한 꿈을 아기라 했고

그걸 쓰다 만 글이 사산아라면


새로 다시 쓰는 것은-.



*



여러모로 나는 겁쟁이라 다행이었다.


독서실의 건물 옥상에 올라섰을 때나

탄약고 초소에서 방아쇠를 건들던 때나

다리 위에 서서 강 아래를 구경하던 때나


내가 조금만 더 용기 있었으면 정말이지 큰 일 날 뻔했다.


*


지금 내가 왜 이런 글을 쓰고 있는지 아는가?


알면 이상한 일이다. 두서도 차례도 없는 헛소리를 마구잡이로 와다다다- 쏟아내고 있으니까.


나는 종교가 없다.

이과 출신이라 초자연적인 현상을 거부한다.


그런데 정말이지 아주 가끔, 운명에 대해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인과관계가 '예정되었나?' 싶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의 내가

대학교 1학년의 나에게 포기하지 않을 이유를 준비했을 줄은 몰랐단 말이다.


고작, 상 받았다는 사진 하나가.


한겨울에 찬물로는 도저히 씻을 수가 없어 물티슈로 대충 닦고 학교 가던, 그러고도 텅 빈 교실에 실실 쪼개면서 교과서에 밑줄 긋던 그 정신 나간 놈이 받은 상 하나가.


결국 찢어져버린 인연에 도로 폐인이 되어 뜬 눈으로 미래가 되지 못한 밤을 지새우는 이 불쌍한 자아에게 포기하지 말라 말한다. 너는 이보다 힘든 시절에도 손에서 펜을 놓지 않았었노라고. 가장 높은 산은 진작에 올랐었지 않느냐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나는 과거의 나를 질투했다.

그렇게까지 처절하게 노력했던 나를, 어찌 그렇게까지 절박하게 매달릴 수 있었느냐고.

꿈을 원망하지는 않았어도 꿈에 미쳐있던 나를 원망했다. 그때 꿈을 좇았기에 지금 이렇게 힘든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그런데 노트북을 뒤지다 알게 됐다. 2018년의 나는 미래의 나에게 어떤 미움도 보내지 않았다. 혹여 성공했다면 축하한다고, 아니라면 그래도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그런 당부의 말을 남겼었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이루었는지도 함께.


징그러운 새끼.


네가 이겼다.


*


<구피 두 마리>는 줄거리가 바뀌었다. 그랬더니 이제 좀 글이 쓰인다.


우선, 유리는 폭력의 피해자가 아니다.


다만 학창 시절 남자친구와의 불장난으로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아이는 서로의 합의하에 지웠고 별 다른 잡음 없이 헤어졌다.


아이는 폭력이 아니라 다만 준비되지 않은 사랑으로 생명을 받고 또 빼앗겼다.


유리는 살아간다.

살아가다 우연히 전 남자친구와 재회한다.


성인이 되어서.


그리고-.


*


지난번 <왜 사는가>라는 글에서 한 가지 맹세한 것이 있다. 다음에는 좀 더 행복한 글을 쓰자고.


그러고 있다.


모든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어야 한다. 슬픈 이야기-Sad story일 수는 있어도 엔딩만큼은 행복해야 한다. 모든 용사는 마왕을 무찌르고 어여쁜 공주님과 사랑을 노래해야 한다. 모든 작가는 그런 글을 써야 한다.


펜은 내가 쥐고 있다.


슬픈 이야기라도 끝에 가선 웃고 있어야 한다.


모든 작가는 행복한 글을 써야 한다.

그래. 펜은 내가 쥐고 있다. 내가 쥐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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