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날을 시작으로 한 해가 시작된다. 내가 태어나고 7일간의 요일은 한 해의 첫 요일이 된다. 나는 1월 1일생이다.
새벽 1시경, 병원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간호사 한 명은 막 출산한 산모를 챙겼다. 그 사이 나는 한쪽에서 씻지 못한 양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고.
부모님은 그때 못 챙겨줘서 내가 약하다고 했다. 돌까지는 경기를 자주 일으켰는데 앉아서 놀던 내가 갑자기 쓰러지면 나를 데리고 이 병원 저 병원 다녔다고 들었다. 가는 병원마다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는데 나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얄따란 목숨줄에 기생하는 잔병들과 함께.
집 근처에는 병원은커녕 약국도 4킬로미터는 넘게 가야 있었다. 옛날 측량 단위로 보면 가는 도중에 발병 난다는 10리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예전에 한약방을 운영했다는, 연세 지긋하신 옆 동네에서 약 할아버지가 가끔씩 오셔서 각종 약재로 만든 환을 놓고 갔다. 뭔지 알 수는 없지만.
내가 먹은 약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약국과 딱 절반쯤 되는 거리에는 한약방이 있었다. 도로에서 다섯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열면 역시 약 할아버지보다는 조금 젊은 할아버지가 진맥을 짚고 약을 처방해 주었다. 용하다는 말을 듣고 엄마가 나를 데려가서 약을 지어 먹였다. 엄마는 하얀 주전자에 약재를 다리고 면포로 짜서 내게 한 잔씩 주었다. (몇 년 뒤 약국에서 한약을 팔 수 있게 되었고, 아빠와 친한 약사 아저씨가 약재 다리는 기계를 약국에 들였다. 그 덕분에 엄마는 집에서 약을 다리지 않아도 됐다.)
"비실아!"
넷째 고모는 이름 대신 나를 이렇게 불렀다. 유치원 때까지는 무슨 뜻인지도 몰랐고, 그냥 어감이 예뻐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고모는 중국 여행을 다녀와서 갈색 작은 병을 엄마에게 내밀었다.
"웅담이래. 쟤 먹여 봐."
어두운 황갈색 유리 같은 조각이 안에 여러 개 들어 있었다. 엄마는 귀한 걸 줬다며 고마워했다. 나는 매일 아침 물과 함께 그 조각을 삼켰다. 내 장기에 구멍을 내는 건 아닌가 무서워하면서.
어디 갈 때마다, 누굴 만날 때마다 허약하단 소리가 빠지지 않자 (뚱뚱하단 사람에겐 '살찐 것 같다'는 말을 잘 안 한다. 상처가 될까 봐 '살'이라는 단어조차 조심스러워한다. 그런데 왜 마른 사람에게는 '더 마른 것 같다'는 말이 인사보다 먼저 나오는 걸까) 엄마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약국보다도 먼 거리에, 병 치료를 잘한다고 소문난 집이 있다는 거였다. 소문난 가정집답게 방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집주인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큰 방에 둘러앉아 있었다.
"놀랬네. 놀랜 기운을 좀 빼야겄어."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말했다. 그러고는 가스레인지 불에 부엌칼을 달궜다.
"손목을 꽉 잡으잉."
엄마가 내 오른쪽 손목을 잡았다.
"더 세게. 그래야 애가 안 아퍼."
세상에! 할머니는 그 칼로 내 손바닥을 찢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손가락뼈가 시작되는 부분의 사이를. 그러더니 여드름 짜듯 찢어진 부분을 짰다. 빨간 피 사이로 누우런 물체가 툭 튀어나왔다. 정말 여드름의 고름 같기도, 작은 애벌레 같기도 했다. (지방이 아니었을까. 누구나 있다는)
"이 눔이 놀래서 생긴 거여. 이제 괜찮을 겨."
그다음에는 왼쪽 두 번째와 세 번째 손가락뼈가 시작되는 부분을 찢었다. 그러고는 다시 오른쪽 세네 번째 손가락이 시작되는 부분을. 왼쪽까지 양손을 한 번씩 번갈아가며 모두 네 군데를 찢기고 쥐어짜인 끝에야 시술은 끝났다. 놀라서 내가 약해진 거라면, 그날 나는 아주 허약체질이 되었어야 했다. 간 떨어지게 놀랐으니까.
할머니는 찐 쑥을 상처 부위에 올려놓고 초록색 청테이프를 칭칭 감아주고는 치료가 끝났다고 했다. 환 몇 개도 받아왔다.
다음 날, 찢어진 부위가 점점 부어올랐다. 쑥을 버리고 청테이프 대신 붕대를 감았는데 부운 정도가 갈수록 심해졌다. 다시 할머니를 찾아갔다.
할머니는 과감하게 아물지 않은 상처에 또 칼을 댔고 시커먼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피가 썩었나 보네."
아무렇지 않게 할머니는 말했다. 주위에 사람들은 조용히 끄덕였다. 내가 나올 때 보니까 어떤 아저씨가 누워서 시술을 기다리고 있었데 그 아저씨는 한 손바닥에 세 군데씩 찢어야 한다고 했다.
"엄마가 잘못 데려온 것 같다. 미안해."
내 손바닥도 제대로 못 쳐다보며 엄마가 말했다.
"너를 1월 1일에 나아서 그런가 보다. 미안해."
엄마는 자꾸 미안해했다. 물론 1월 1일에 엄마가 나를 낳은 건 맞지만, 하필 병원에 의사가 없는 그날에 나오겠다고 고집을 부린 건 나다. 게다가 고통을 수치로 환산했을 때 출산은 작열통(불에 타는 고통), 절단에 의한 고통에 이어 3위에 랭크된 고통을 겪는다. (작열통과 절단은 사고에 의한 경우가 많으니 자연적으로 겪는 것 중에서는 출산의 고통이 가장 크다 하겠다.) 물론 나오는 아이는 더 큰 고통을 이기고 나온다고도 하던데 그래도 그 고통을 이기려고 10개월 동안 엄마의 양분을 쪽쪽 빨아먹지 않았는가. 미안해해야 할 사람은 나다.
1월 1일에 태어나 안 좋은 점을 굳이 찾자면 생일 때가 겨울방학이라 생일잔치를 한 번도 못했다는 점?
1월 1일에 태어난 덕분에 한 해를 꽉 차게 보낸다. 1월 1일에 태어난 덕분에 만 나이를 따로 계산하지 않아도 된다. 1월 1일에 태어난 덕분에 인터넷으로 본인 확인을 할 때 생년월일을 고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며 묻는다.
"진짜 1월 1일이 생일이야?"
* 한의원은 한의대를 졸업하고 시험을 거친 사람들에게 발급하는 자격증이다. 예전에는 오래전 동네에서 약재 좀 다룰 줄 안다는 분들이 한약방을 차렸다. 한의학 체계가 잡힌 뒤 기존 종사자들을 대우하는 차원에서 간단한 시험만 치르면 한약방 자격증을 내줬다. 1970년 이후에는 기존에 등록된 곳을 제외하고는 새로 한약방을 열 수 없으며, 한약방 등록자가 사망하면 자격이 상실되니 그야말로 자격증 희귀템 중 희귀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