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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전원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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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진 Sep 10. 2021

추억의 불량식품

초등학교는 한 학년에 한 반뿐이었다. '뿐'이라는 말을 쓰기가 좀 그런 게, 그때는 모든 학교가 그런 줄 알았다. 1학년 1반, 2학년 1반, 3학년 1반, 4학년 1반, 5학년 1반, 6학년 1반. 전교생은 180명 정도였다.

학교 앞에는 구멍가게가 두 개 있었다. 한 곳은 학교에서 가까워서 주로 쉬는 시간에 놀거리를 사러 갔다. 고무줄이나 공기, 종이 인형 같은. 종이 인형은 수영복만 입은 인형에 옷을 돌려 입히는 놀이였다. 책 틈에는 늘 인형 옷이 끼어 있었다. 종이 인형만의 옷장이었다. 종이 딱지도 열심히 샀다. 한 장을 다 뜯으면 딱지가 30개 정도 되는데, 침을 묻혀 넘기거나 입김을 불어 넘기며 딱지치기도 많이 했다.

한 곳은 교문 밖으로 나가야 했는데 할머니가 직접 사는 집 한 쪽을 가게로 꾸며놓은 거였다. 할머니 집과 가게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건 좋은 점이 엄청 많았다. 할머니는 점심마다 부엌 아궁이에 불을 올리고 한 솥 가득 물을 끓였다. 곧 아이들이 와서 컵라면을 살 테니까. (급식이 없어서 도시락을 싸가야 했다.)

컵라면을 뜯고 기다리면 할머니나 고학년 언니오빠들이 물을 부어줬다. 그러면 우리는 컵라면을 손에 쥐고 조심조심 학교로 돌아갔다. 담벼락 한쪽에 개구멍이 있었는데 라면을 들고 통과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정문까지 돌아가면 그 사이에 라면이 불을 테니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면 몸을 숙이고 개구멍을 들어가야 했다.

먹는 컵라면 종류는 뻔했다. 네모 모양의 용기에 담긴 팔도도시락, 작은 용기에 담긴 짜장범벅. 그래도 집에서 라면을 먹으라고 하는 날이면 아침부터 들떠서 무슨 라면을 먹을지 계속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나 오늘 라면 먹는다."

누구라도 이렇게 말하면 다들 그 옆으로 몰려들었다.

"정말? 나 국물 쪼금만."

라면 국물을 얻으려고 엄마가 나를 위해 정성껏 만들었을 도시락 반찬을 선뜻 내어주기도 했다. 국물에 말아먹는 밥이 최고였다. 내가 한 번 얻어먹으면 다음에 내가 라면을 먹을 때 국물을 나눠줬다.

"오늘 라면 먹을 건데, 국물 줄까?"

그러면 거절할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맛있는 돈가스를 싸왔을지라도.

가게 할머니는 라면 물은 공짜로 주었지만, 마루에 있는 전화기를 쓸 때는 한 통에 백 원씩인가 내게 했다. 친구들하고 놀다 가고 싶을 때 할머니에게 백 원을 내고 회전 다이얼판을 돌려 집에 전화를 걸곤 했다.

"엄마, 친구네 가서 놀다 가도 돼요?"

열에 아홉은 '그래'라는 말을 듣는다.

"할머니, 잘 썼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분 좋게 가게를 뛰쳐나와 곧장 친구 집으로 직행하곤 했다.

이런 일이 아니어도 거의 매일 가게를 들렀다. 아폴로나 오다리, 꾀돌이, 논두렁밭두렁, 별뽀빠이, 쫀듸기, 호박꿀맛나, 쌀대롱까지 맛있는 게 얼마나 많던지. 접은 종이가 백 개쯤 스템플러로 박힌 뽑기판도 있었다. 백 원씩 내고 종이를 고르는데 매번 꽝만 나오지 뭘 얻은 적이 없던 것 같다. 늘 과일맛 사탕 한 개를 받아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제일 많이 사먹은 건 참라면이었다. 바닥에 라면을 놓고 팔꿈치로 쳐서 잘게 면을 부쉈다. 스프를 뿌려 봉지 입구를 쥐고 여러 번 흔들면 스프가 면에 골고루 뭍혔다. 꼭 오른손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만 라면을 먹었다. 그래야 아까운 라면 스프가 다른 데 안 묻고 양 손가락 끝에 두껍게 잘 발라진다. 라면을 다 먹어 아쉬울 때 손가락을 빨아먹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짭쪼롬한 맛이 혀 끝을 자극하면 기분마저 행복해졌다. 그런 날은 집에 가는 길이 멀지 않더라.

요즘도 마트에 가면 브이콘, 꾀돌이 등이 눈에 띄기도 한다. 나는 가끔 몇 백 원을 주고 돌아오지 않을 시절의 추억을 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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