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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소요 Sep 29. 2022

불온한 교실 5

5. 난파

스스로가 성범죄의 피해를 입었다고 인식하는 순간, 여성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무엇일까? 나는 당연하게도 여성 대상의 범죄에 늘 관심이 많았다. 기울어진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어왔으며 여성이 안전하지 못한 나라에 사는 것에 분노해 왔다. 언제 나의 주변에 성범죄 피해자가 발생할지 모르니 그들을 즉각, 그리고 적절하게 도울 수 있는 매뉴얼 따위를 미리 숙지해 두기도 했다. 정작 내가 그 시커먼 악행의 한가운데에 서게 되었을 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너무 많은 것들이 질서 없이 엉켜있었다. 무엇이 먼저랄 것도 없이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무너져내리듯 쏟아졌다. 당장 사건을 공론화시키고 학생을 처벌하고 싶었지만 무작정 신고를 한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만큼의 마땅한 처벌이 내려질지 모를 일이었다. 상대는 미성년자이자 학생이었다. 높은 확률로 내가 불리했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뉴스 기사를 접하며 학습된 무기력이 나를 강하게 짓눌렀다. 분노, 모멸감, 두려움 따위가 머릿속을 끝도 없이 휘저어 혼란한 한편 이게 정말 나에게 일어난 일이 맞는지 끊임없이 반문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가장 먼저 든 결심은 도망치고 좌절하는 피해자의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무결한 피해자이므로 턱을 똑바로 들고 가해자를 엄격히 처벌하고 말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어떻게? K고교는 나의 피해를 제대로 이해해줄 수 있는 집단이 아니었다. 그곳은 나이 든 교사들이 젊은 여교사들의 의상을 주기적으로 단속하는 곳이었다. 여교사화장실에 도어락을 설치하는 곳이었다. 나는 직감했다. 이 일은 나의 탓이 될 것이었다. 계산을 마친 나는 우선 검색을 시작했다. 

몇 날 며칠 휴대폰과 노트북을 붙잡고 있었던 결과 경찰, 해바라기센터, 교육청 소속의 변호사 정도가 내가 당장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결론이 섰다. 학교에서 수업이 없는 틈틈이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고 글을 남겼다. 이때 이미 나는 정상적인 수업이 불가한 상태였다. 나를 끔찍하게 묘사한 그림을 너무 많은 학생들이 돌려본 상황이었다. A가 수십 번 수백 번 연습한 끝에 그려낸 나의 얼굴선과 턱 아래의 작은 점, 머리카락의 흐름, 그 날 그 날의 옷차림(그러나 그 옷들이 다 흘러내려 헐벗은 상태인), 습관적인 자세 등이 꼭 닮은 그림. A의 이름을 한 나체의 남성에게 성적으로 유린 당하는 나의 그림이나 만화들. A는 전시라도 하듯 자신이 그린 나의 그림에 반드시 내 이름을 써넣었다. 그리고 내가 수업을 들어가는 학급의 아이들에게, 우리반 아이들에게 그것들을 보여주었다. 나는 조례나 수업에 들어갈 때마다 아이들의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워졌다. 이 아이도 그 그림을 봤을까?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아이도 나를 성적인 시선으로 바라볼까? 교단에 서서 학생들의 눈을 마주치며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재잘대는 게 나의 일이었는데. 어느새 나는 그들 앞에서 시 한 편 제대로 읽기가 어려워져 있었다. 나는 점차 이상해져 갔다. 나는 내 몸채만한 가디건이나 담뇨를 둘둘 말아 침낭같은 형태를 한 채 수업에 들어갔다. 나의 신체의 어떠한 부분에도 남학생의 시선이 닿을 수 없도록 했다. 얼굴까지 가려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노릇이었다. 교실 앞쪽에 서있을 수가 없어 자꾸만 교실 뒤편으로 숨어들었다.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자신들의 뒷통수에 대고 수업을 하는 나를 의아하게 여겼을 것이다. 아니, 실은 그들 중 대부분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교탁 뒤에 몸을 숨기고 숨죽여 울거나 교실 뒤편에 못 박힌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기만 하는 나를 눈치챘을 것이다. 이미 A의 그림은 퍼질대로 퍼져있었고 내가 그 사실을 인지했다는 것까지 소문이 퍼져있었다. 약 2~3주 동안을 이러한 상태로 수업에 임했다. A를 나와 분리시키지 못한 채로. A를 분리시키려면 명분이 필요했는데 그러려면 학교측에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다. 그러나 학교를 믿을 수 없었다. 나와 가까운 K고교의 교사들은 하나같이 학교에 알리기를 만류했다. 그들은 나보다 경력이 많은 교사들이었고 학교 혹은 교사라는 집단이 젊은 여성을 어떻게 대하는지 너무 잘 알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학교에 알리지 않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경찰이나 변호사는 나에게 가해자가 학생이라 선생님께서 원하시는 처벌은 이끌어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나를 달래듯 단념시키려는 어투로 말했다. 해바라기 센터쪽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력감과 막막함이 나를 덮쳐왔다.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을 내가 직접 나서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괴로웠다. 수집된 증거 하나하나 클릭하여 파일집으로 묶어 저장하고, 끝도 없이 검색하고 곳곳에 전화를 돌려 내게 일어난 일을 진술했다. 그때의 나는 난리통에 무언가를 잃어버린 미친 여자의 몰골과 같았을 것이다. 


그러기를 몇 주,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졌다. 내게 일어난 일을 모른 척하고 싶어졌다. 내가 피해를 입었음을 증명해내고 가해학생에게 마땅한 처벌이 내려지게끔 애를 쓰는 그 모든 행위, 그 모든 시간들이 날카롭게 나를 찔러왔다. 나는 이제 잠을 이루지 못 하는 몸이 되어있었다. 외부에서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결론에 미치자 나는 하는 수 없이 학교에 이 사실을 알렸다. 우선 나를 전적으로 도와주고 있던 동료교사가 인성부장, 교감과 교무부장에게 모든 사실을 보고했다. 그들은 크게 당황했고 즉시 나를 걱정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그들은 모두 중년남성이었고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이기로 유명한 도시 출신이었다. 진심으로 나를 걱정했다기보다는 당시 뉴스를 채우던 미투관련 기사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내가 그들의 의중을 이리 비관적으로 짐작하는 이유는 학교에 피해 사실을 알리자마자 2차 가해가 줄줄이 따라왔기 때문이다. 

교감은 나에게 병가를 내고 며칠 쉬다 오라고 했다. 나는 거절했다. 피해자인 내가 학교를 떠나야 할 이유는 없었다. 또한 내가 없는 사이에 학교에서 일을 축소 시킬 것이 우려되었다. 거기에 더하여 미련한 나는 이 사건은 나의 사적인 영역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당시에는 판단했다.)이니 공적인 일, 즉 담임교사로서의 역할이나 교과교사로서의 수업, 그 외 행정적 업무를 제대로 처리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 나의 의지에 대한 반응은 조소였다. 내가 병가를 거절하자 관리자들은 나의 동료교사에게 “학교 다닐만 한가보다. 별 일 아니니 계속 출근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나는 학교 측의 말을 전해 들은 즉시 교감을 찾아가 병가를 내겠다고 말했다. 교감은 묻지도 않고 허가해 주었다. 3일간의 공무상 병가를 내고, 집으로 돌아가 짐을 쌌다. 

그 날은 수요일이었던 것 같다. 배낭을 둘러메고 터미널로 가 버스를 탔다. 그리고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일에 대해 조금도 일러둔 바가 없었다. 주말마다 본가에 가선 그 주에 있었던 귀여운 학생들에 대한 일화, 재미있고 엉뚱한 사건들이나 실컷 떠들어대곤 했다. 아빠가 나를 반기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냥 대뜸 지금 시외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아빠는 답이 없었다. 잠시 동안의 침묵 후, 아빠는 조금 전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일단 집으로 와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아빠는 교사로 근무 중이다. 머리를 스치는 수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울음이 밀려와 제대로 답하지 못 하고 전화를 끊었다. 눈을 감고 머리를 좌석에 기대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숨을 아주 얕게 쉬고 있었다. 아무리 들이마셔도 나의 목 절반도 넘어가지 못 하는 숨을 헐떡이며 울음을 눌렀다. 버스를 내리자 마중 나온 아빠의 차가 보였다. 아빠의 차를 타고 집을 향해 가던 때의 불길한 서먹함. 집에 가니 엄마가 두 손을 꼭 쥔 채 거실에 앉아 있었다. 아빠가 들고 있던 나의 짐을 받아들며 나의 모습을 살폈다. 나는 그때 너무나 너덜너덜해져 섭식장애에 가까운 증상을 보이고 있었으며 손을 지나치게 많이 떨었다. 부모의 눈에 어떻게 비춰졌을지 모르겠다. 우리 셋은 거실에 둥글게 앉았다. 내게 일어난 일을 천천히 꺼내놓았다. 다 갈라지는 목소리로 아주 낮게 말했던 것 같다. 아빠는 얼굴을 쓸어내렸고 엄마는 눈물을 글썽였다. 아빠는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는 학교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나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몇 가지 조언해 주었다. 엄마는 나의 팔과 손을 몇 번이나 쓸어내렸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그 대화 후 나는 내리 3일 동안 잠만 잤다. 그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도시에선 잘 오지 않게 되어버린 잠이 본가에선 병에 걸린 것마냥 쏟아졌다.

병가 후 학교로 돌아가니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나의 요구에 따라 A는 나와 완전히 분리되었다. 등교하자마자 상담실로 보내졌고 하교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했다. 그렇지만 쉬는 시간이나 식사 시간에는 움직임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나는 교무실 나의 자리에 하루 종일 박혀있었다. 우리반 아이들을 보러 교실에 들려야 하거나 화장실에 가야 할 일이 생기면 살금살금 나가서는 코너 뒤에 잠깐 숨었다가 슬쩍 내다본 뒤 후다닥 몸을 옮겼다. 다른 교사들은 내게 일어난 일을 어느 정도 눈치챘다. 공무상의 병가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복무 사항이 아니므로 내게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학교에 근무하는 내내 나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로 여겨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이 보기엔 언젠가 생길 만한 일이 생긴 거였다. K고교의 나이 많은 남교사들은 그린 듯한 2차 가해를 시작했다. 이러니까 여자 선생을 뽑으면 안 된다고 말했고, 병가를 다녀온 뒤 나의 태도가 불량해졌다고 지적했다.(내가 이전보다 어두워져서 인사를 살갑게 하지 않는 점을 문제 삼았다.) 저래 가지고 학급 관리나 수업은 똑바로 하겠냐는 말이 나올 때쯤, 드디어 본격적으로 교권보호위원회가 준비되기 시작했다.     


죽으란 법은 없는지, 나에겐 아주 든든한 동료교사 J가 있었다. 그는 말 그대로 발벗고 나를 도와주었다. 성인지 감수성이라고는 없는 학교 관리자들에게 이 일의 심각성을 몇 번이고 주지시켜주었고, 인성부(옛날의 학생부 같은 역할을 하는 부서) 기획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교권위원회나 징계위원회가 지체없이 열릴 수 있게 힘써주었다. 나는 이제 정말 손 하나 까딱하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그러나 아직 주저앉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10장 분량의 진술서를 써냈다. 그마저도 너무 담백하다는 동료교사들의 평을 받고 몇 번이고 고쳐써야 했지만, 내가 겪은 악몽을 꾹꾹 눌러 담아냈다. 

몇 번의 회의가 열리고 난 뒤, J는 착잡한 표정으로 나를 따로 불러냈다. 관리자들이나 운영위원장(학부모 대표)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일이 그다지 심각한 사안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들은 나의 진술서를 시큰둥하게 넘겨보다 치워버렸다. 회의 때 잠깐 참석한 A에게 ‘우리 때는 이런 일이 허다했는데. 남자 애들 크면서 한 번씩 다 이런다’고 말하며 ‘그림 좋아한다고? 꿈도 있을 거고, 그렇지?’라고 격려도 빼먹지 않았다고. 관리자들과 운영위원장 모두 중년 남성이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자녀를 둔 아버지들이었다. 나는 구렁텅이 속으로 머리부터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J에게 이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의 상황이 흐릿하게 번져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끔찍했던 기분만 희미하게 떠오른다. 그 뒤 어떤 시간을 보냈더라. 그저 억지로 잠을 청하려 눕고, 뜬눈으로 밤을 꼬박 새웠다. 입속을 모래로 가득 채운 것 같은 느낌을 안고 더운 물에 샤워를 하고 아무 옷이나 꿰어입었다. 학교에서는 굵다란 바늘 위를 걷는 것 같은 시간을 보내고 병원으로 갔다. 검색 끝에 찾아낸 친절한 여자 의사가 있는 병원으로 가 수면제와 안정제를 탔다. 병원에서 나오면 큰 찻길이 죽 이어졌는데 그 길을 아무 이유 없이 걸었다. 차들이 빠르게 달리며 나의 머리칼을 이리저리 흩날렸고 나는 입속에 머리칼이 들어가도 내버려 둔 채 집까지 걸었다. 그런 시간들만 떠오른다.   

  

이쯤에서 바로 결과를 얘기하자면 A는 퇴학 처분을 받았다. 당초 봉사 5일 정도를 내리려 했으나 마지막 회의 때 마지막 발언 자리에서 “***선생님 어차피 저랑 계속 학교 다니셔야 하니까 빨리 털어내시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내뱉었고, 이것이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마음을 뒤집어놓았다. 반성의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 태도에 결정권자들의 분개를 샀다. 그제서야 A의 악질적인 면을 알아차린 그들은 최고로 높은 수위의 처분인 퇴학을 내렸다. A는 억울해 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들었다. 그러나 관대한 대한민국. 퇴학 처분을 받은 학생이 자신의 의지로 전학을 택하면 아무런 기록 없이 깨끗한 학생부를 가진 채 일반 전학 처리된다는 사실, 알고 있는가. 나는 이때 처음 알았다. A와 A의 부모는 퇴학 처분이 떨어지자마자 자신들을 받아줄 인근의 고등학교를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는 바로 시골의 한 인문계로 가버렸다. 2년 간 나를 스토킹하고 나를 이용한 음화를 수도 없이 그려 학생들과 공유하고 게시한 가해자는 그렇게 ‘전학생’이라는 이름으로 도망쳤다. 허무하게도.     

A가 도망친 뒤 나는 극심한 우울증과 공황장애, 불안장애와 함께 남겨졌다. 호흡이 고르지 못 해 자주 헐떡였고 밤이면 울음을 통제하지 못 해 몇 시간이고 오열했다. 울며 불며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신에게 이대로 잠들어 다시는 눈을 뜨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A의 얼굴이나 눈빛이 늘 나를 따라다니는 것 같은 환시에 시달렸다. 남교사나 남학생을 쳐다보는 것조차 내게는 고통이었다. 그 고통은 내내 이어졌다. A를 퇴학까지 시켰는데 이전으로 돌아오지 않는 나를 보며 학교에서는 의문을 표했다. 나의 근무 태도를 문제 삼았고, 애초에 내가 모든 일의 원인이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렇게 나는 그 학교에서 내쫓겼다. 행실이 단정치 못 해 물의를 일으키는 교사가 되어 K고교를 떠났다.     

K고교에 근무한지 2년차였던 때, 어느 회식 자리에서 나는 여교사화장실에 도어락을 달게 한 장본인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는 범행 후에도 시종일관 학교를 해맑게 누볐다고 한다. 그리곤 A와 마찬가지로 변두리의 어느 인문계로 일반 전학을 갔다. 전학 가는 날 그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여기저기 큰소리로 인사를 건네고 다녔다고 한다. 이 상황을 견디지 못 한 피해교사는 결국 학교를 떠났다. K고교는 언제나 그런 곳이었다. 가해자는 안전한 곳으로 숨겨주고 피해자를 없애버리는 곳. 그리고 또다른 피해자가 나타나 학교를 어지럽히지 않도록 잠정적 피해자들을 옥죄이는 곳.     

내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에는 찐득찐득한 불쾌감과 숨이 턱 막히는 답답함을 한 번에 씻어내려 줄 시원한 이벤트 같은 건 없었다. 악을 징벌하는 정의는 영화에나 있는 가치였고 내게 남은 것은 병든 몸과 마음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그곳에서 멀어졌다. 가라앉았다. 깊숙이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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