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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소요 Sep 29. 2022

불온한 교실 6

6. 가라앉은 배의 돛을 펼치게

K고교에서 2년을 보낸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탱탱볼같은 성정의 소유자였다. 작은 일에도 꺄르르 웃어 넘어가는 밝고 활달한 사람이었다. 넘치게 받은 사랑 덕인지 나름대로 단단한 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에 금이 간 것이다. 균열은 미세했으나 치밀했다. 단숨에 나의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나를 어그러지게 했다. 비틀어지고 바스라지고 무너지고 내려앉고. 그토록 생의 의지를 잃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살아야 했다. 나의 죽음을 괴로워할 이가 너무 많았고 칼날의 모서리나 낙하하여 닿게 될 땅바닥의 단단함 같은 것들이 두려웠다. 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겨우 물을 따라 마시고 더운 음식을 입에 쑤셔넣었다. 약을 한 움큼 털어넣어야만 잠에 들 수 있었지만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계속 살아있기로 했다.     


나는 이제 교실에서 남학생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졌다. K고교에서 나온 뒤, 나는 S고교로 갔다. 이곳은 여자고등학교로 여자 교장 아래로 적절한 성비의 교사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1년 정도 휴식을 취하라는 지인들도 많았지만 비정규직 여성에게 어떤 이유로든 경력단절은 치명적일 것이라 쉴 여유같은 건 없었다. 그리고 고작 그따위 존재가 나의 인생의 속도를 조절할 순 없다는 오기도 있었던 것 같다. 여러 이유로 나는 계속 일하는 것을 택했고 그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S고교에서 나는 치유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다. 

K고교에서 얻은 정신질환은 여전했다. 나는 여전히 진정제와 수면제를 함께 복용하지 않으면 잠을 아예 자지 못 하거나 자다가도 발작하듯 깨어났다. 그런 새벽에는 살아갈 날을 헤아렸다. 살아갈 날이 너무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던 지난날의 내가 우습게 여겨지는 느낌을 아는가. 나는 다시는 이전의 햇살같은 마음을 가진 나로 돌아갈 수 없었다. 당장의 내일을 살아내기도 버거운 내게 미래라니. 벌을 받는 것 같았다. 깊숙이 가라앉은 나는 바다의 바닥에 닿을 것만 같았다. 먼지 한 점 일지 않게 천천히.     


S고교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쯤 코로나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온라인 수업이 전면적으로 실시되고 있었고 학교는 전에 없던 상황에 발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 하루하루 애를 먹고 있었다. 이때 내게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랴 온갖 플랫폼을 활용하며 수업을 준비하랴 정신없이 바빴던 덕에 학교에 머무는 동안은 침울해 할 틈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여학생들과의 첫 만남도 온라인 상에서 이루어졌다. 초반에는 쌍방향 원격수업이 아닌 수업 영상을 촬영하여 플랫폼에 올리는 형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학생들은 영상을 보고 과제를 수행한 뒤 댓글과 함께 게시물을 올리는 식으로 수업에 참여하였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데 게시물이나 댓글을 통해서만 소통을 하다 보니 학생들이 나의 수업에 대해 영 시큰둥할 것이라 생각했다. 초반에는 지극히 형식적이고 짧은 대화들만이 오갔다. 오늘의 수업 영상입니다. 정해진 시간 내로 시청하시고 첨부된 파일의 과제를 수행하여 올려주세요, 하고 글을 쓰면 얼마 뒤 제출합니다, 하는 글이 달렸다. 그렇게 몇 번의 소통 아닌 소통을 주고 받다 보니 신기하게도 조금씩 말을 걸어오는 아이들이 나타났다. 수업을 올릴 때 은근슬쩍 작은 곰돌이 그림같은 걸 끼워 올렸더니 그걸 귀여워해 주는 아이들이 생겨났고 나의 목소리나 말하기 습관을 좋아해 주는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자신들이 단 댓글에 대답을 하니 거기에 감동을 받았다고 말하는 아이도 있었다. 나는 그렇게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이들과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다 1학기 초반의 어느 날, 나는 대뜸 실시간 쌍방향 원격 수업으로 공개수업을 하게 된다. 코로나로 인한 온라인 수업 기간이 길어지자 전국의 단위학교에서는 실시간 쌍방향 원격 수업이라는 개념이 막 도입되고 있었다. 당연히 체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이 훨씬 많았고 교사들은 거의 울면서 교실에서의 수업을 온라인상에서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을 실험해 보고 있었다. S고교는 인구가 적은 지방의 작은 학교라는 허점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학교였다. 소위 말하는 고인물이 거의 없는 분위기였다. 그들은 언제나 가장 빠르게 가장 최신의 교육 이슈에 주목해 그에 대한 방안을 마련하고 이를 바로 실천하는 편이었는데, 쌍방향 원격 수업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수업 송출을 위한 카메라와 조명을 구매하더니 온라인 수업을 위한 교실을 꾸려주었다. 그리고 학교 측은 나에게 이 모든 것들을 이용하여 공개수업을 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왜 나였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면 조금은 부당한 흐름이 있었겠거니 짐작해 볼 수 있지만 상관없었다. 사실 나는 발표나 연설 같은 공개적 말하기를 즐기는 편이기 때문이다.) 익숙치 않은 수업 방식이야 익히면 되고 공개수업이야 준비하면 되니 거리낄 게 없었지만 문제가 딱 하나 있었다. 아이들과의 유대가 0에 수렴한다는 점이었다. 공개수업이란 평소의 수업보다 좀 더 매끄럽고 멋지게 진행하고 싶은 법이다. 타인에게 내보이는 수업이다 보니 시작부터 끝까지 실수 하나 없이 잘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려면 교사와 학생 간의 호흡이 굉장히 중요한데, 나는 나의 공개수업의 대상이 되는 학생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거의 남남인데 공개수업을 하라니, 꽤나 곤란한 일이었다. 우선은 학교의 제안을 수락한 뒤 고민에 빠졌다. 하는 수없이 학생들에게 긴 안내문을 작성해 공지를 올렸고, 한 명씩 전화를 돌렸다. 아직 친해지지도 않았는데 공개수업이라는 부담스러움을 주어서 미안하다, 어려운 것은 하지 않을 테니 조금 적극적으로 참여해 줄 수 있겠느냐는 말을 했던 것 같다. 학생들은 본래 수업 시간에 앉아서 조금 졸기도 하고 잠깐씩 딴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런 편안한 수업을 받다가 갑자기 공개수업을 하게 되면 당연히 학생들도 부담을 느낀다. 게다가 온라인 공개수업은 나도 그들도 처음이라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렇지만 별 수 있겠는가. 나는 이미 공개수업을 하겠다고 해버렸는데. 은은한 불안감을 안은 채로 수업 준비에 돌입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드디어 공개수업 당일이 되었다. 수업 시작을 몇 분 앞둔 때, 나는 카메라 앞에 서서 원격수업 플랫폼을 켰다. 학생들이 빠르게 입장했고 나는 화면을 보며 마이크에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1반 친구들.”

답을 기대하고 건넨 인사는 아니었는데, 여러 명의 학생들이 동시에 왁 하고 답했다.

“안녕하세요!”

S고교 학생들의 목소리를 처음 듣게 된 순간이었다. 그 짧은 인사 속에 어쩐지 들뜸과 반가움과 생생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1반 친구들. 우리 처음 인사하는 건데 이렇게 온라인 상이라 슬퍼요. 그리고 다짜고짜 공개수업을 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잘 부탁해요.”

“괜찮아요!”

“선생님 너무 귀여워요!”

나는 어리둥절했다. 사실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협조를 부탁한 상황이었는데 그들은 내게 너무나 호의적이었다.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어쩌면 엄중하게 진행되어야 할 수업이었다. 학교 사람들이 한 데 모여 송출되는 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고 다른 학교의 교사들 몇 명도 수업 현장을 견학 온 상황이었다. 수업 장면을 촬영해 지역 신문에 싣겠다는 데에도 사전에 동의해 둔 상태였다. 그렇지만 나는 아이들의 환대에 이미 넘어가 있었다. 그 흐름 그대로 수업을 진행했고, 결과적으로 꽤나 성공적인 공개수업이 되었다. 

     

이 흐름은 S고교에 머무는 내내 이어졌다. 나는 애초에 역량이 그리 굉장하지 않은 사람이라 학생들에게 대단히 잘해주지도 않았고 수업을 기똥차게 잘 하지도 않았다. 그냥 다른 교사들보다 학생들을 조금 더 귀여워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들은 그 점을 나의 굉장한 장점으로 여겨주었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나를 좋아해 주었다. 그 좋아함에는 조금도 음침한 구석이 없었다. 그저 맑고 환한 마음이었다. 그들은 수시로 작은 쪽지나 편지에 나에 대한 사랑을 가득 담아서 내게 전해주었으며 쉬는 시간에 종종 나의 자리로 찾아와서 말을 걸었다. 복도를 걸어가는 내게 대뜸 다가와 사탕이나 젤리를 내 손에 쥐어주고 도망을 치기도 했다. 멀리서도 나를 보면 쪼르르 달려와 인사했고 자기들 사이에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를 조잘조잘 들려주기도 했다. 내 휴대전화나 태블릿을 보면 슬쩍 가져가서 몰래 셀카나 영상편지를 남겨두었고 내게 자신들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간지러운 봄날같은 기분이 된다. 운명이나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편이지만 내가 딱 그때 S고교에 가게 된 것은 신비롭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적절하고 결정적인 일이었다. 


학생들이 사랑스러운 덕에 학교의 분위기가 그리 형성이 된 건지, 그 학교가 본래 그런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여자학교의 특징인지 근무 환경도 좋았다. K고교에 근무하는 내내 시달렸던 옷차림과 행실에 대한 지적(몸의 형태가 드러나는 옷을 입지 말라, 목선이 보이게 머리를 묶지 말라, 교탁에 몸을 기대면 가슴 그림자가 보이니 똑바로 서서 수업하라 등. 무수히 많은 지적을 받아 다 기억나지도 않는다.)같은 것은 자취를 감추었다. S고교의 교사들은 정을 가장하여 사생활을 침해하는 법이 없었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무심하지도 않아 필요한 정도의 도움을 제공해 주었다. 여자 교장은 우수한 여성 인재를 길러내는 데 관심이 많았고 여성교육에 이바지하는 데에 진심인 사람이었다. 단호하고 날카로웠지만 그 점 덕분에 적당한 긴장감 속에서 업무를 정확히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런 교장 아래에 속해있는 영향인지 S고교는 형님 형님하며 공식적인 일 처리를 뭉개는 등 친목을 통한 주먹구구식의 업무 관행이 없었고 깔끔하고 합리적으로 모든 절차를 진행했다.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거의 받지 않을 수도 있구나, 정말 그런 직장이 있긴 하구나 싶었다. 분명 S고교에도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문제점이 존재했을 것이고 이에 불만을 품고 있는 교사들도 있었을 것이다. 문제행동을 하는 학생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고 (세상에 그런 학교는 없다. 단언할 수 있다.) 교사들의 속을 썩이는 돌발적인 사건들도 분명 종종 있었다. 그러나 K고교가 워낙 유별나게 고통스러운 곳이었기 때문인지 S고교의 모든 것들이 다 괜찮게만 느껴졌다. 이전의 위태롭고 위험한 그 기억들을 모두 차치하고 보더라도 S고교는 좋은 학교였다. 학생들의 표정과 말투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항상 웃고 있지만은 않았지만 솔직했다. 속상한 일이 있으면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하고 씩씩거리며 열을 올리기도 했지만 돌아서면 건물이 쩡쩡 울리도록 깔깔대며 웃었고 어린 강아지들처럼 방방대며 여기저기서 뛰놀았다. 


S고교는 언덕배기에 위치해 있었는데 학교 전체가 하나의 꿈동산 같았다. 표현이 유치하게 들리겠지만 정말 그런 곳이었다. 사시사철 잘 관리된 정원에 계절에 맞는 꽃과 나무가 피어났다. 학생들은 봄에는 벚나무 아래에서 뛰어다녔고 여름에는 수국 다발 속에 앉아있었다. 철마다 우르르 모여 사진을 찍어댔는데 그때마다 꼭 나를 불러내서 끼워주었다.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내게 어떻게 그렇게 많은 정을 줄 수 있었던 것일까? 만약 내가 종교를 가진 사람이었다면 그들을 하늘에서 내려준 신의 사자들이라 믿었을 것이다. 교실에서 받은 상처를 교실에서 치유하며 나는 다시 단단해져 갔다. 금이 가 퍼석퍼석 갈라진 내게 그들이 흠뻑 물을 주고 다부지고 매끄럽게 다져주었다. 깨진 사금파리는 다시는 온전한 도자기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 좌절했으나 그들은 기꺼이 나의 조각들을 그러모으더니 손수 이어붙여 하나의 그럴듯한 형상을 만들어주었다. 스승의 은혜라는 표현을 흔히들 쓰는데 나는 오히려 S고교의 학생들에게 은혜를 잔뜩 입었다.      


떠올리면 눈물이 핑 돌고 몸의 한가운데가 울렁이는 것만 같은 그 꿈결같은 시간을 보내고 난 뒤, 나는 가까스로 보통 사람 노릇이라는 궤도에 다시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다. 발이 푹푹 빠지다 결국에는 나를 다 집어삼키는 늪바닥에 쳐박혀 가라앉은 줄 알았는데 아이들이 끝없이 물을 길어다 부어준 덕인지 나는 다시 떠오르게 되었다. 이내 축축히 젖어 쓸모없어 보이던 돛을 펼쳐 그들이 불어다 준 선선한 바람에 나를 다 말리고 또 살아갈 여정을 이어가게 되었다. 여전히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렸으나 그것을 끌어안고 나아갈 힘을 얻은 것이다. 그렇게 되자 나는 드디어 주변을 둘러볼 기력이 생겼다. 


나의 바깥의 세상에서는 너무 많은 여성들이 어디서든 죽임과 강간과 폭행을 당하고 있었다. 너무 많은 여교사들이 학교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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