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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지고 울고 다시 쓰고... 현장이 나를 만든 시간들

나는 어떻게 방송작가 일을 계속할 수 있었는가

by 작가의식탁 이효진

방송작가로서의 첫 발걸음은 설렘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제주 지역 방송사에 입사했지만, 현실은 상상과 너무 달랐다. 리포터 중심의 체제 속에서 작가라는 개념은 희미했고 가르쳐줄 선배도 없었다. 모든 것은 스스로 배워야 했다.


처음 나는 지역 대형 서점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찾은 ‘수다로 푸는 방송작가 입문서, [방송작가로 가는 길]’이라는 책은 방송 제작과 구성에 대해 상세히 적혀 있었다. 그 책 덕분에 방송 원고를 배울 수 있었다.


또한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필사하듯 받아 적기도 했다. 라디오 방송에서 가장 중요한 건 오프닝 멘트였다. 매 정시 정각, 오프닝 시그널이 울리면 난 대기하고 있다가 녹음 버튼을 눌러 플레이시키고, 한 글자 한 글자 놓치지 않고 받아 적었다. 다시 듣기가 불가능했기에,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하듯 받아 적었다. 그렇게 완성한 오프닝 모음집을 반복해서 읽고 분석하며 방송 원고 쓰기 연습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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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속 첫 좌절과 기쁨


현실은 책 속과 달랐다. 지역 방송사에는 제작비가 충분하지 않아 작가료조차 제대로 책정되지 않았다. 처음엔 제작비 내에서 소액을 받으며 일했다. 매일 아이템 선정, 섭외, 편집, 원고 작성, 심지어 리포터 역할까지 겸해야 했다. 프로그램 내 작가 역할을 맡은 건 오롯이 나 혼자였다.


힘들었지만, 좋아하는 일을 돈을 받고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그 작은 성취감이 매 순간 버티게 해 준 힘이 되었다. 라디오 부장님은 이런 나를 살뜰히 챙겨주셨다. 내가 받는 금액이 거의 용돈 수준임을 아시고, 설이나 추석 연휴가 되면 ‘열심히 해라’는 격려와 함께 연휴비라는 명목으로 몇 만원을 조심스럽게 건네주셨다. 그 따뜻한 손길과 격려 덕분에 나는 좌절 대신 현장 속에서 배움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후 나는 제작비가 리포터 중심으로만 책정되던 구조속에서도 작가료가 새로 책정되는 변화를 만들어냈다.



친구의 아카데미 경험


함께 시작한 친구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그 친구는 스포트라이트가 아나운서와 PD에게 집중되는 현실을 보고 “우리가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대우도 공평하지 않다”고 느꼈다. 그 친구는 방송 아카데미를 다녀야 진짜 제대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고, 나에게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당시 나는 집안 사정상 수업료와 서울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었지만, 시험은 치르고 싶었다. 합격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나는 수업료를 내고 배우는 대신, 현장에서 돈을 받고 배우기로 결심했다. 친구는 아카데미에서 수업료를 내고 체계적으로 학습을 이어갔지만, 이후 제주로 내려와 지역 방송사에 들어왔을 때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친구는 매일 이어지는 방송 제작과 섭외, 원고 작성의 반복 속에서 스트레스가 컸고 결국 제작팀으로부터 “그만두면 좋겠다”는 권고를 받았다. 그 친구는 그 경험 속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길을 깨닫고 용기 있게 다른 삶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처럼 갓 들어온 동료들은 방송작가라는 직업의 매력에 이끌려 시작했지만, 현실의 압박과 반복되는 업무, 스포트라이트의 불균형 속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다. 하루 만에 그만두는 경우도, 일주일 만에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길게 버틴 경우는 한 달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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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속의 해우소, 감정 훈련


나는 매일이 도전이었다. 아이템을 찾고 섭외하고 편집하며 원고를 작성하고 심지어 리포터 역할까지 동시에 수행했다. 그렇게 점차 능력을 쌓아갔지만 MC들은 내 원고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PD님도 고개를 저었다. 그럴 때면 나는 방송국 작은 화장실 구석을 찾아갔다. 그곳이 나의 해우소였다.


화장실에서 울며 마음을 정리한 뒤, 거울 앞에서 다시 활짝 웃었다. “나는 할 수 있다. 다음엔 더 잘하자.”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PD님이 내 손을 잡고 “잘했어, 같이 하자”라고 말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애써 웃음을 지었다.


이 과정에서 깨달았다. 책과 이론만으로 배울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깨지고 다시 일어서는 경험이야말로 나를 강하게 만드는 길이라는 것을. 훗날, 그 PD님이 다른 방송사로 이동해 일할 때, 가장 먼저 내게 전화해 “같이 일하자”고 손을 내밀어 주셨다.



성장과 선택


지역 방송사에서 시작한 경험 덕분에 편집과 섭외, 원고 작성 능력이 쌓였다. 나중에는 보도팀에서 뉴스 PD를 맡아보지 않겠냐는 제안까지 받을 정도로 성장했지만, 나는 당시 그 각박한 환경을 견뎌내야 함이 두려워 제안을 거절했다. 그 대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이어가며 경험과 능력을 쌓는 길을 선택했다.



배움의 진정한 의미


방송작가의 길은 단순히 글을 잘 쓰는 재능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끈기, 현실을 견디는 힘, 그리고 무엇보다 방송을 사랑하는 마음이 함께할 때 비로소 지속될 수 있다. 나의 오프닝 모음집과 책, 친구의 사례, 동료들의 포기, 나의 좌절과 성장… 모든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든 밑거름이 되었다.


울고, 다시 웃고, 또다시 도전하는 과정에서 나만의 길을 만들어가는 법을 배웠다. 방송작가라는 직업의 현실과 열악함, 그 속에서 피어난 성장과 우정, 배움과 깨달음. 이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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