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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 뜨겁게 라디오와 연애하다

나의 청춘이 가장 뜨거웠던 시절

by 작가의식탁 이효진


방송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나는 무작정 방송국 문을 두드렸다. 기회가 없다고 말해도 매일 전화를 걸었다. 또 걸었다. 그때의 나는 뜨거웠고 절박했다. 그러던 어느 날, 라디오 부장님의 한마디가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꿨다.


“시사방송 작가 뽑습니다. 하실래요?”


사실 나는 음악방송을 하고 싶었다. 시사방송은 관심조차 없었다. 하지만 기회가 그렇게 내 앞에 문을 두드렸는데, 따질 이유가 없었다.


“네, 하겠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나의 첫 방송작가 생활은 시작되었다.



매일이 데드라인, 매일이 긴박함


처음 발을 디딘 세계는 생각보다 거칠고 뜨거웠다. 시사 프로그램의 하루는 단순한 하루가 아니었다. 매일 5명의 출연자 섭외, 원고 작성, 현장 인터뷰, 편집… 그 모든 것을 PD님과 나, 단 두 사람이 채워 넣어야 한다. 그야말로 ‘오늘을 버티면 내일이 온다’는 마음으로 버티는 하루였다.


이 거친 세계 한가운데로 나를 데려간 사람은 누구보다 뜨거운 한 PD였다. 열정이 몸 밖으로 새어 나오는 사람. 매일같이 “9시 뉴스는 꼭 봐!”라며 문자나 전화가 왔고 “넌 이제 연애하지 마. 방송이랑 연애해”라고 진심 반 농담 반의 말들이 늘 따라붙었다.


선후배들은 그를 두고 “지독한 PD 만났다”고 수군거렸지만, 나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보았다. 프로그램을 살리기 위해서 치열하게 뛰는 사람. 누군가에게는 과해 보인 열정이, 내게는 방송의 기본을 온몸으로 배우는 강력한 현장 교과서였다.


그의 곁에서 나는 처음으로 뉴스를 읽는 법, 아이템을 구성하는 법, 사람을 설득하는 섭외의 기술, 그리고 무엇보다 ‘매일 버티는 힘’을 배웠다.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던 어느 날, 입 밖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나... 시사방송 재미있어졌어.”


내가 가장 싫어하던 세계였는데 막상 열고 들어가니 새로운 언어들이 보이고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구나 싶었다. 뉴스 한 줄 뒤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니. 그렇게 나는 내가 외면하던 세계 안에서 의외의 즐거움과 내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었다.


우리는 종종 ‘몰라서 싫어하는’ 경험을 한다. 들어가 보지도 않고 해보지도 않은 세계를 먼저 밀어내는 것. 하지만 시사 방송은 내가 멀리하고 싶었던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나를 넓히고 확장시켜 준 세계였다.



몰입의 이면 – 내가 놓치고 있던 것들


시사 프로그램을 맡으면서 내 삶의 리듬은 완전히 뒤집혔다. 나는 어느 순간 극단적으로 집중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모니터 속 글자 하나, 아이템 기사 하나, 섭외 전화 한 통에 정신이 몰두해 있으면 바로 옆에서 동료 작가가 말을 걸어도 나는 전혀 듣지 못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무시’로 보였다는 걸 나는 오래 뒤, 한참 후 결혼하고 나서야 알았다.

남편이 어느 날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신, 누가 뭐라고 하면 잘 못 들어. 그러면 사람들이 상처받을 수 있어.”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엄마에게 무언가를 말해도 내가 아예 듣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아이들은 서운함을 품고 있었다. 그때서야 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일에 빠져 있을 때는 다른 소리가 잘 안 들려. 그럴 땐 엄마를 툭툭 쳐서 알려줘. ‘엄마, 나랑 얘기해요’ 하고.”


그제서야 문득 과거가 떠올랐다. 동료 작가들이 나를 ‘대화도 나누려 하지 않고 고개도 안 드는 사람’이라 오해했던 시절. 나는 그저 한 줄이라도 더 정확한 원고를 쓰려고 온 신경을 쏟고 있던 것뿐인데 그 몰입이 누군가에게 차갑고 무심한 벽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돌아보면, 방송 일을 사랑한 만큼, 나는 그 사랑만큼 사람들을 놓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스스로 발견하고 뒤늦게라도 고쳐가며 다시 관계를 회복해가는 과정 또한 내 인생의 중요한 배움이었다.



그리고 되찾은 꿈, 음악 프로그램


시사 프로그램에서 단련된 뒤 신기하게도 처음에 꿈꾸던 음악 정보 프로그램의 기회가 찾아왔다. 내가 가장 원하던 세계. 그 프로그램은 오랫동안 이어졌고 라디오의 감성과 정보의 리듬을 자연스럽게 엮어낼 수 있었다.


초반의 거칠었던 경험 덕분인지 음악 프로그램을 할 때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성장은 늘 순서를 갖고 온다는 것을.



영어 하나 못하지만 영어방송까지 하다


그러다 어느 날 함께 일했던 PD님께서 연락이 왔다.


“아리랑국제방송에서 제주 담당 작가가 필요하대.”


나는 당황했다.


“저... 영어 못하는데요?”


그러자 돌아온 말.


“괜찮아. 영어는 번역 작가가 따로 있어.”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나는 제주를 가장 잘 아는 제주 토박이였으니 가능하다고 했다.


문제는… 편성이었다.

기존 프로그램은 이른 아침, 아리랑 방송은 밤늦은 시간.


몸은 금방 한계를 보였다. 잠을 몇 시간 자는 지 알 수 없었고 늘 피곤했고 스스로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친한 언니는 말했다.


“효진아, 그건 무리야. 그만둬. 너 건강이 먼저야.”


나도 그만둬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PD님에게 말했다.


“저… 그만두려고 해요.”


그러자 돌아온 말.


“통장에 입금했어. 너 있어야 돼. 힘들겠지만 같이 해보자.”


그 순간, 도망칠래야 도망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두 프로그램을 동시에 해나갔다. 이상하게도 일은 어느 순간 관성처럼 익숙해져 갔다. 경제적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고 무엇보다 작가로서의 나를 넓히는 시간이었다. 힘들었지만 돌아보면 그때의 나는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방송과 연애하던 시절의 끝에서


그렇게 나는 라디오에서, TV에서, 영어방송에서, 이후 교통방송까지, 시사와 음악과 정보를 넘나들며 제주의 작은 방송국 안에서 만날 수 있는 거의 모든 프로그램을 경험했다.


이 일이 나를 지치게도 했지만 결국 나를 만든 것도 이 일들이었다. 감성 한 줄로 시작한 내가 현장과 뉴스, 사회의 언어를 배우며 방송작가로서의 20년을 만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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