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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과 선택과 쓰는 사람으로서의 출발

그 모든 시작의 조각들

by 작가의식탁 이효진

국문과 선택


쓰는 사람으로 살아남기의 출발선은 어쩌면 아주 오래전, 내가 학창시절 국어를 좋아했던 순간부터였는지도 모른다.나는 원래 하고 싶은 것만 깊게 파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잘하는 과목은 끝까지 잘했고, 다른 과목들은 영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국어, 문학, 고전, 현대문학은 조금만 공부해도 상위권을 놓친 적이 없었다. 이해되고 좋아하고 자연스럽게 손이 가는 분야였기 때문이다.


대학교 진학을 앞둔 나는 한 가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나는 수학이 너무 싫다.’


그래서 수학을 최대한 피할 수 있는 과를 찾았고, 자연스럽게 마음은 국문과로 향했다. 국어 성적도 좋았고, 무엇보다 문학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3 담임선생님은 국문과 지원을 말렸다. 성적이 너무 아슬아슬하다는 이유였다. 그 당시는 특히 여학생을 육지 대학에 보내지 않던 분위기였고 제주대학교 국문과도 결코 만만히 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떨어지면 전문대로 가야 하는데 괜찮겠니?”


큰 언니도 같은 조언을 했다.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정말 국문과는 나와 먼 길일까?


결국 나는 1학년 때 담임선생님과 문학 선생님께 찾아가 상담했다. 두 분은 나를 잘 알고 있었고 다른 반의 고3 담임이기도 했다. 선생님들은 솔직하게 말했다.


“가능성은 있다. 그런데 떨어질 확률도 있다. 정말 가고 싶다면... 눈치 작전으로 가자.”


그 방법은 명확했다. 원서 접수 마지막 날까지 지원 현황을 지켜보는 것. 안정권 친구들은 미리 원서를 냈고 나처럼 불안한 친구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마지막까지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확인할 수 있었다. 국문과 지원자가 예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을. 선생님이 말했다.


“이제 넣자. 너 될 거야.”


그렇게 나는 국문과를 지원했고 결국 합격했다.



문학 선생님을 다시 만나다


입학 후 어느 날, 캠퍼스에서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고등학교 시절 나를 가르쳤던 문학 선생님이었다. 이제는 선생님이 아니라 같은 대학의 동문으로 만난 셈이었다. 나를 보자마자 선생님은 이렇게 물었다.


“요즘 글 써? 소설 한 편은 써야지.”


그 말이 내 마음 깊은 곳을 툭 하고 건드렸다. 마치 누군가가 나에게 ‘너는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이다’라고 단정해주는 기분이었다. 아마 그 순간이 내가 쓰는 사람으로 살아남기라는 여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창작 수업에서 비로소 '나'를 만나다


국문과에서의 삶은 놀라울 만큼 자연스러웠다. 특히 시창작 수업과 소설창작 수업은 내가 그동안 찾아 헤맨 자리처럼 딱 맞았다. 외우는 공부가 아니라 ‘만드는 일’. 책 속 문장이 아니라 ‘내 이야기를 짓는 일’. 그 모든 과정이 나에게는 즐거움이었다.


교수님들도 내 기질을 빨리 알아보셨다. 창작수업은 점수가 까다롭기로 유명해서 학생들이 기피하는 수업이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 수업에서 늘 A를 받았다. 점수를 쉽게 주는 교수님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 글을 인정해주셨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큰 힘이 되었다.


시창작 교수님은 어느 날 내게 이렇게 말했다.


“시 정말 잘 쓴다. 내가 활동하는 계간문예지에 들어가 보지 않겠냐?”


사실 당시 나는 순수문학보다 방송에 더 마음이 가 있었다. 하지만 같은 과 친구가 “혼자 가기 좀 그러니까, 너도 같이 가자” 해서 한동안 교수님의 계간문예지에서 활동했다. 그때 교수님이 내게 해주신 말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너는 쓰는 사람으로 살아도 먹고살 수 있다. 계속 글을 써라. 내가 도와주겠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우리 집의 상황, 절박한 취업 걱정. 그리고 스스로 ‘지금은 글만 쓰고 있을 때가 아니다’라고 판단한 마음. 나는 결국 교수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저는 방송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교수님은 방송계의 현실도 잘 알고 계셨다. 그 일은 고되고 여유가 없다고 조심스럽게 말려주셨지만, 나는 이미 마음을 정한 뒤였다. 그래서 계간문예지 활동을 정리하고 방송작가의 길로 방향을 돌렸다.



백록문학상 수상, 작은 성취


대학 시절 나는 신문사 주최 백록문학상에 응모했다. 가작으로 당선됐는데, 그 해 입상자가 가작 두 편뿐이었다. 손에 상패를 들고 걸어 나오던 그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아, 나는 정말 쓰는 사람의 길 위에 서 있구나.'


그것은 대단한 수상도, 인생을 바꾼 큰 사건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작은 기쁨이 내 안에서 오랫동안 반짝였다. 작은 인정 하나가 사람을 얼마나 멀리 데려다주는지,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모든 시작은 작은 조각들이었다


돌아보면, 모든 시작은 거창하지 않았다. 국어를 좋아했던 아이. 국문과에 간절히 들어가고 싶었던 마음. 떨리는 손으로 제출한 원서. 그리고 대학 시절 내가 쓴 글로 인정받은 첫 순간, 교수님과의 대화, 창작수업에서의 즐거움, 그리고 작은 상 하나.


그 모든 조각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내 인생의 첫 장은 그때 이미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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