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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이 만든 아나운서, 그리고 쓰는 사람 나의 이야기

결국 나는 글이었다

by 작가의식탁 이효진


폭설이 만든 ‘아나운서의 기적’


방송작가가 되고 싶어서 방송국에 들어갔던 그때, 나는 누구보다 뜨거웠다. 그 열정 때문일까. 그때 만난 아나운서 언니와 금세 마음이 맞았다. 언니는 아나운서가 되고 싶어 제주에 내려온 사람이었다. 언니는 스스로 얼굴에 자신 없다고 말했지만, 누가 봐도 아나운서의 결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아나운서가 되고 싶으면, 내가 먼저 아나운서처럼 살아야지.”


언니는 학창 시절부터 그렇게 연습했다고 했다. 단발머리로 자르고, 말투를 고치고, 습관을 다잡고, 표정을 연습하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늘 ‘아나운서답게’ 준비한 사람.


그러던 어느 겨울, 제주에 폭설이 내렸다. 아나운서 시험 당일. 제주행 비행기는 모두 결항되었다. 전국의 수험생들이 발이 묶였지만 언니는 전날 미리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합격.


언니는 폭설 덕분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간절히 준비한 사람에게는 세상이 한 번쯤은 길을 열어주나 봐.”


그 말을 들은 순간, 언니의 간절함이 내 안에서 ‘작가의 간절함’을 밀어 올리는 것을 느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었지만 마음만큼은 같은 자리에서 뛰고 있었다. 그 시절 라디오도 TV도 우리는 함께 만들어갔다. 수많은 코너와 기획들. 내 초반 작가생활은 그렇게 반짝였다.



언니가 떠난 날, 나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언니의 방송사 계약 기간 4년이 끝나고, 언니는 제주를 떠났다. 나는 라디오와 TV 프로그램을 오가며 일했지만 결국 TV 프로그램이 정리되면서 라디오 한 프로그램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하루 종일 같은 프로그램 안에서 같은 역할을 반복하다 보니 언니가 남기고 간 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작가료는 낮았고, 프로그램은 점점 재미를 잃어갔다. 나는 어느새 생계를 위해 과외 알바, KT 상품 안내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하고 있었다. 글을 쓰는 사람의 하루가 글과 상관없는 일로 채워지고 있다는 현실이 한없이 답답했다. 그때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불안정한 일을 붙들고 있는 걸까?’


열정은 식었고, 현실만 남았다.



도망치듯 시작한 소방공무원 준비


그러던 어느 날, 마음속에서 이상한 결론이 올라왔다.


‘차라리 안정적인 일을 하자.’


그래서 나는 불쑥 소방공무원을 준비하기로 했다. 라디오 스튜디오를 나와 도서관과 카페를 전전하며 하루 종일 문제집과 씨름했고 밤까지 앉아 공부했다.


어느 날 도서관 화장실을 오가던 중,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보세요, 정신 차리세요. 괜찮아요?”


그 순간, 내 몸이 이미 무너져 있음을 알았다. 바닥에서 숨을 몰아쉬며, 이상하게 또렷한 한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이 길을 가면 안 되는 사람이구나.’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간절히 원했던 안정은 안정적인 직업이 아니라 쓰는 일을 하고 있다는 그 감각, 그 순간의 삶이었다는 것을. 소방공무원 준비는 그렇게 멈췄다.



다시 아나운서 언니의 연락


아나운서 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다른 지역 방송사에 새로 들어가게 됐다며 나에게 원고를 맡아달라는 이야기였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메일로 오프닝 원고와 코너 원고를 보내며 나는 다시 살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언니와 함께 했던 시간의 온기가 그대로 되살아났다. 방송 일은 다시 재미있어졌고 나는 불안 대신 ‘일하고 있다’는 감각을 되찾았다.


하지만 이후에 나는 그 일을 내려놓았다. 타 지역이었기에 그 지역만의 문화, 말투, 기후, 생활 감각들이 원고에 녹아들어야 하는데 멀리서 메일로만 작업하는 나는 그 미묘함을 담기가 어려웠다. 나는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이제는 그 지역 작가님과 함께 하는 게 더 맞는 거 같아요.”


마음은 복잡했지만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조용히 다른 지역 작가 일을 그만두었다.



다시 돌아온 자리, 그리고 ‘코너 작가’라는 길


라디오의 단조로움이 깊어지던 어느 날,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무 힘들다. 지역 방송사에서 프로그램 하나만 붙잡고 사는데 작가료도 낮고, 재미도 없고…뭔가 돌파구를 만들 순 없을까?’


그때 떠올린 사람이 있었다. 후배 작가였다. 나는 그를 찾아가 말했다.


“우리 프로그램에 네가 코너를 써줄래? 대신 내가 너희 프로그램 코너에 출연할게. 서로 돕자.”


이 작은 제안에서 시작된 것이 ‘코너 작가’ 시스템이었다. 각자의 프로그램에서 서로 코너를 만들어주고 출연과 작가 역할을 보완하며 한 프로그램만으로 생계를 버티기 어려운 현실을 조금씩 돌파해나갔다. 그렇게 라디오 속에 작은 코너들이 하나둘씩 생겨났고 나는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즐거움을 되찾았다. 프로그램을 넘나들며 오히려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무너질 듯 버티던 순간에서 오히려 새로운 창구가 열린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코너작가 시스템은 쓰는 일을 계속할 수 있게 해준 생존 방식이자 스스로 길을 만든 첫 경험이었다.



다시 깨닫는 쓰는 사람으로 살아남기


돌이켜보면 그 모든 출발점은 ‘간절함’이었다. 아나운서를 꿈꾸던 언니의 간절함, 작가가 되고 싶었던 나의 간절함, 그리고 이후 버티기 위해 만들어낸 작가들의 협업 시스템까지.


쓰는 사람으로 살아남는 법은 사실 거창하지 않았다. 누구의 자리를 대신하거나 화려한 운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자리에서 서로를 돕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는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쓰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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