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가 되고 싶었던 나
IMF 한복판이던 1990년대 후반, 대학교 4학년이었던 나는 그야말로 취업이 절실했다. 우리 집은 작은 옷가게를 운영했지만, 자동차의 대중화와 온라인 쇼핑몰이 등장하면서 장사는 빠르게 기울고 있었다. 대학 등록금 한 한기 마련하는 것도 숨이 찼다.
첫째 언니는 회계사가 되겠다며 서울에서 재수와 삼수를 이어가고 있었다. 둘째 언니는 교사가 되기 위해 재수와 삼수를 반복했다. 하지만 집안 사정이 좋지 않으니 단순히 공부만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둘째 언니는 교사 임용고시를 준비하면서 동시에 학원에 취업해 나의 대학 등록금을 보태주었다. 나는 그 도움으로 겨우 대학 졸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때 부모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만큼은 반드시 졸업과 동시에 취업해야 한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말 속에는 간절함, 기대, 그리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현실이 모두 들어 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방송이 좋았다. 고등학교 시절, 시내에서 자취를 하던 나는 엄마의 뜻대로 TV 하나 없는 자취방에서 생활을 했다. 공부에만 집중하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나는 방송이 보고 싶었다. 결국“EBS만큼은 봐야 한다”고 엄마를 설득해 TV를 들여놓았지만 엄마는 모든 채널을 막고 EBS만 나오도록 설정해 두셨다. 그때부터 나는 자연스럽게 라디오로 향했다. 밤마다 이어폰을 끼고 사연을 듣다 잠들곤 했다. 어쩌면 그때 나는 이미 방송작가를 꿈꾸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 시절,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취업하는 것이 나의 의무처럼 여겨졌다. 우리집 사정을 생각하면 그랬다. 그래서 엄마는 국문과인 내게 취업문이 열려 있는 금융업계를 권하셨다.
나는 “안 되면 말지, 뭐”하는 마음으로 면접을 보러 갔다. 그런데 의외였다. 합격이 된 것이다. 그것도 대학교 4학년 3월, 학기 초였다. 운 좋게 취업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곳에는 국문과 선배님도 계셨디. 나를 보며 선배님은 말했다.
“국문과는 취업 어렵잖아. 정말 잘 왔어. 출발 좋네.”
격려도 있었고 적응도 잘했다. 하지만 숫자와 상품을 다루는 일은 내 적성과는 거리가 있었다. 일은 할만했지만 마음은 점점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나는 방송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 마음은 하루도 잊혀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을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길을 찾아야 했다. 꿈을 향해 가되, 부모님 걱정은 덜어드리는 것. 그러기 위해 먼저 내려놓아야 하는 게 있었다. 바로 ‘안정적인 직장’. 국문과 선배님은 나를 붙잡았다.
“너 국문과 나와서 어디 취업하려고? 지금 자리가 얼마나 귀한데? 다시 생각해봐.”
고맙고 따뜻한 말이었지만, 그 말은 내 마음을 더 답답하게 만들었다. 나는 결국 그 일을 박차고 나왔다. 부모님께는 솔직히 말씀드리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부모님이 실망하실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4학년이 되면 결석 몇 번만 해도 학점이 인정이 안 된대요. 지금은 학교에 집중해야 할 때예요.”
내가 던진 말 속에는 사실은 꿈을 쫓아 나아가고 있다는 진짜 이유가 숨어 있었다.
조사해보니 방송작가가 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인맥
방송아카데미
둘 다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인맥은 없었고 아카데미 수업료도 마련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세 번째 길을 만들기로 했다.
직접 기회를 만들어 보기
나는 전화번호부를 뒤적여 지역 방송사 번호를 찾았다. MBC와 KBS... 운 좋게 라디오 부장님 직통 번호가 그대로 실려 있었다. 나는 용기내 전화를 걸었다.
“혹시 방송작가 채용 기회가 있을까요?”
“기회를 주실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대답은 이랬다.
“죄송하지만 경력자만 뽑습니다.”
“방송작가는 없고요. 저희는 리포터 체제로 진행합니다.”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특히 MBC 라디오 부장님과는 워낙 자주 통화해서 목소리만 들어도 나를 아시는 것 같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말이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력서를 출력해 방송국에 직접 방문하기도 했고, 자기소개서와 프로그램 기획안까지 손수 만들어 제출했다. 그리고 또 전화했다.
거절, 또 거절.
어느 날도 다시 MBC 라디오 부장님께 전화를 드렸다.
“혹시 방송작가 자리 생긴 건 없을까요?”
“없습니다.”
살짝 단호한 말투였다. 그 말이 마지막 확인이었다. 전화를 끊는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정말 포기해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전화기를 내려놓은 바로 그때, 갑자기 집 전화벨이 울렸다.
따르릉
순간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운명 같았다.
“여보세요?”
“이효진씨 되시죠? 아까 통화했던 라디오 부장입니다.”
숨이 멎을 만큼 놀랐다.
“때마침 지금 라디오 시사프로에서 방송작가를 구하고 있습니다. 한 번 시작해 보시겠어요?”
“물론이죠. 바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졸업 전, 2학기가 시작되기 전 일찌감치 취업에 성공했다. 덕분에 부모님께 떳떳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결국 나는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내 안에 심을 수 있었다.
당시 지역방송사는 리포터 중심의 체제였다. 그곳에서 나는 작가로 첫발을 내디뎠고. 이후 방송사가 리포터 중심에서 작가체제로 변화하는 흐름의 시작점을 함께 만들어내는 역사까지 경험했다. 참, 그리고 방송작가로서 내 길을 열어주셨던 당시 제주MBC 라디오 부장님은 이후 내 결혼식에서 주례를 서주시기까지 했다.
절심함으로 버텼던 그 취업 도전기가 있었기에 나는 이후 20년 동안 방송작가로서의 길을 단단하게 이어갈 수 있었다.
수십 번의 전화, 수 없는 거절, 손글씨로 채워 넣은 이력서와 나를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밤마다 고쳐 쓴 자기소개서. 방송을 좋아해 모니터하며 새 아이디어를 찾아 만든 기획서들. 문전박대 당해도 돌아서지 않던 그 시절의 나...
그 모든 순간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든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