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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치고써 Mar 16. 2024

빼앗긴 월급

이백 아흔한 번째 글: 얼마나 저를 원망하고 있을까요?

어제는 저의 월급날이었습니다. 현직에서 근무한 지 정확히 24년 1개월 되었으니, 이번 것까지 해서 모두 289번째 월급인 셈입니다. 문득 월급날과 관련한 과거의 한 에피소드가 떠올랐습니다. 사실 이 에피소드는 저에겐 한낱 우스갯거리였지만, 저와는 일면식도 없던 누군가에게는 살면서 가장 가슴 아프고 뼈 시린 경험이 되었을 그런 일이었습니다.


언제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제가 현직에 발령받은 후 몇 년 동안은 월급이 한 달에 두 번 나왔습니다. 지금은 다 포함해서 매월 17일에 딱 한 번 월급이 나오지만, 그때는 교통비와 급식비 명목의 170,000원이 매월 1일에 나왔고, 당시의 제 월급이 대략 200만 원이 채 안 되었으니 나머지 금액인 1,830,000원이 매월 17일에 나왔습니다.


지금의 제 아내와 결혼 전 만남을 이어가고 있던 때였습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아마도 그날이 분명 1일이었을 겁니다. 그때 아내는 직장에 나가고 있었는데, 저와의 만남에 관심을 갖고 끊임없이 물어주던 직장 선배 한 명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분의 남편 분 역시 대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분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날 170,000원을 받았으니 시쳇말로 한 턱을 냈습니다. 사건은 바로 그 다음날 일어났습니다.


한창 일하고 있는데 그 언니가 아내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요새 그 선생님 잘 만나고 있나?”

“네, 어제도 그 선생님이 월급 탔다고 하면서 저녁을 사줬어요.”

“다행이네. 마음이 좀 맞긴 맞는 사람인가 보네.”

그렇게 대화가 끝나는가 싶더니 그 언니라는 분이 일을 하다 무슨 생각엔가 골똘히 빠지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잠깐만, 그런데 얼마 전에도 그 선생님이 월급 받았다고 하면서 너한테 저녁 사 줬잖아?”

“맞아요. 선생님이 그러던데요. 월급이 매월 1일과 17일에 두 번 나온다고 말이에요.”

그 짧은 시간에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가던 그 언니라는 사람을 보면서 아내는 말실수를 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급기야 사장에게 하루 조퇴를 하겠다고 하면서 일찍 퇴근했다고 합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싶어 내내 불안해하던 아내는 다음 날 언니를 만나자마자 물었습니다.

“언니, 괜찮아요? 어제 혹시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에요?”

“일은 무슨? 아니 괜찮아. 그나저나 너 오늘 먹고 싶은 거 뭐 없니? 내가 다 사 줄게.”

표정이 환희에 찬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심각한 얼굴빛도 되는 것 같아서 분명히 무슨 일이 있긴 있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아내가, 그 언니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아니, 이 인간이 20년이나 넘게 날 속이고 있었지, 뭐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언니?”

“어제 집에 가자마자 사실대로 깨 놓으라고 얘기했어. 그동안 매월 1일에 받았던 월급은 어디 갔냐고 말이야.”

“그래서요? 남편 분께서 뭐라고 하셨어요?”

“글쎄, 이 인간이 나 몰래 통장을 하나 만들어서 그 안에 1일의 월급을 모아 오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말이야. 그게 도대체 얼마인지 알아? 3천만 원이 넘더라고!”

“네?”

“왜 이것밖에 없냐고? 모자라는 5년 치의 월급은 어디 갔냐고 다그쳤더니 그동안 필요한 곳에 썼다고 하더라고.”

3천만 원은 15년 동안의 1일의 월급을 모은 금액입니다. 하루아침에 그 피 같은 돈을 부인에게 빼앗기고 말았으니, 얼마나 원통하고 가슴 아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저희 두 사람이 결혼할 때에도 그 언니 분은 오셨는데, 혹시 남편 분이 오시진 않았을까, 하며 꽤 긴장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늘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만, 종종 월급날이 되면 생각나는 사건입니다. 물론 저 역시 그걸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모든 돈은 투명하게 집행해야 한다는 순수한(?) 생각을 갖고 있던 저의 무의식적인 발언에서 비롯된 사건이긴 하지만, 얼굴도 모르는 그 선생님을 생각하면 마냥 웃고 있을 순 없는 그런 일이었습니다. 아마 제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그 사람을 두고두고 원망했을지도 모르니까요.


사진 출처: https://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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