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백 스물두 번째 글: 나른한 오후이지만 이번에도 힘차게!
나른한 오후입니다. 점심을 배불리 먹었으니 잠시 잠이 몰려올 법도 합니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지 않은가,라고 하던 어딘가에서 많이 본 구절이 생각이 납니다. 마침 점심 식사 후 바로 다가온 수업이 체육 전담 수업이라 아이들은 총알같이 수업을 하러 가고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데나 자리를 펴고 누울 수는 없습니다. 매번 앵무새처럼 수백 번도, 수천 번도 반복해야 하는 말들을 되뇌며 살다 보니 조금이라도 시간이 생길 때가 되면 시쳇말로 멘탈이 털린다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조용히 침잠해 있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기도 하고, 때로는 다가올 일정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간혹 스쳐갔던 인연들도 떠올려 보고, 어떤 식으로든 지금 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형성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하루 종일 시끌벅적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우리 같은 사람으로서는 고작 40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그만큼 더 소중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문득 지금 시각을 확인합니다. 벌써 12시 37분, 이제 저에게 허락된 시간은 23분 남짓입니다. 과연 이 23분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마음은 그렇다고 해도 굳이 생각까지 거창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단은 이런 식으로 쓰고 있는 글 하나는 충분히 매듭을 지을 수 있는 틈이긴 합니다.
오늘은 6교시까지 있는 날이라, 아이들이 들어오고 난 뒤에도 두 시간의 수업을 더 해야 합니다. 2시 40분이면 아이들이 집에 가긴 합니다만, 아이들이 하교했다고 해서 우리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가 배정받은 업무에 따라 다르겠으나 본격적인 업무는 아이들의 하교 후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시골 장터의 장이 들어서기 전의 풍경처럼 고즈넉하기 그지없습니다. 장이 서는 그날을 제외하면 과연 그곳이 장터인가 싶을 정도로 조용합니다. 그러다 그날이 되면 주변 교통이 마비되는 것은 물론이고 곳곳에선 인산인해를 이루기 마련입니다. 지금 저 혼자 앉아 있는 교실이 그러합니다. 20분 남짓한 시간이 지나면 교실 안이 꽉 들어차고 소란스러워집니다.
대략 절반 정도는 지났고, 이제 남은 네댓 시간 정도만 집중하면 또 그렇게 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오늘 하루는 과연 잘 보냈을까요? 글쎄요, 아직은 이에 대해 자신 있는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 매번 되풀이되는 저녁 시간의 엄숙한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지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나른한 오후입니다만, 그래서 더욱 나른해지고 싶지 않은 오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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