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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치고써 Jul 20. 2023

허망한 죽음

열네 번째 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선생님!

서울의 모 초등학교 선생님이 학부모의 민원에 시달리다 그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이 일을 두고 지금 전국이 떠들썩하다. 그도 그럴 것이 발령받은 지 갓 2년 된 교사, 23살이라는 꽃다운 나이인 것을 감안하면 더더욱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교원단체에선 본 사건에 대한 철저한 진상 규명을 촉구하고 있고, 그 선생님과는 일면식도 없는 전국의 선생님들이 보낸 조화로 학교 주변이 뒤덮일 정도라고 한다. 오후에 벌써 학교 앞에 배달된 조화만 해도 300여 개가 넘는다는 말이 있었다.

맞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명 안타까운 죽음이다.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여기에서 우린 냉정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어나선 안 되는데  기어이 일어나고 말았다는 말은, 충분히 사전에 이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선생님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을까?

그건 민원 혹은 진상 학부모를 걸러낼 수 있는 시스템의 부재 때문이다. 학교는 조직사회이다. 조직사회라는 것은 일정한 틀을 가진 시스템에 따라 운용되는 사회란 뜻이다. 그런데 유독 교직사회는, 더 나아가 공무원 사회는 시스템이 들어서야 할 자리에 개인을 떠다밀어놓곤 한다. 그렇게 강조하던 조직은 온데간데없고 결정적인 순간에 벼랑에 서면 주변엔 아무도 없는 식이다. 그렇게 되면 열정을 쏟아가며 했던 일도 그만두게 되고, 간혹 누군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한 번이라도 교단에 서 본 사람들은 교직사회 속의 교사는 철저히 '을'이 될 수밖에 없다 걸 알 수 있다. 교사가 뭔가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교직이라는 경직된 위계사회에 소속된 데다 이마저도 철저히 상명하복의 시스템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다 보니, 그 어떠한 경우에도 교사는 '갑'은커녕 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교감선생님이나 교장선생님, 그리고 교육청(혹은 교육지원청)이 '갑'에 맞서 '을'을 보호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이조차도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그저 그들의 개인적 양심이나 공동체 의식에 근거하여 어떻게 위기에 처한 선생님을 도와주지도 않느냐고 따질 수 없는 구조라는 문제이다. 이런 문제에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차후 그들이 승진을 한다거나 다른 근무처로의 이동에 있어 심각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그들에게 최소한의 인간으로서의 심정도 없다고 어찌 탓할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의 인생이 중요하듯 그들도 그들의 삶이 있고, 그 삶에는 반드시 가족이 함께 한다. 명색이 관리자라는 사람들이 교사 편을 들지 않는다고 그들을 나무라선 안 된다는 얘기다. 흔히 관리자는 뒷짐만 지고 있다고 손가락질하지만, 뒷짐만 지고 서 있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게 현재의 교직사회 시스템이란 걸 잊어선 안 된다고 본다. 누군가는 그런 부당한 시스템을 이겨내기도 하겠지만, 그걸 이겨내는 누군가가 있다고 해서 모두에게 요구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가끔, 아주 가끔 학부모와 싸워서 이기려는 후배 선생님을 볼 때가 있다. 대리만족과도 같은 통쾌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을이 어찌 갑을 이길 수 있겠는가? 이런 시도를 꾀하는 교사가 있다면 그는 아직 연차가 얼마 안 되었거나 생각이 짧은 것이다. 인정하긴 싫어도 우린 학부모에게 저자세를 보일 수밖에 없다어떤 경우에도 학부모에게 흠이 잡히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대개 25명이 넘는 아이들을 대하면서, 어떻게 모든 아이들에게 공평무사하게 대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가? 그건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 교만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와서 24년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늘 살얼음판 위를 걸어왔던 인생이었다. 어쩌면 '오늘도 무사히'라는 좌우명을 내걸고 하루하루 운행하는 운전기사님들처럼 나의 인생도 그러했다.

순탄한 학부모를 만나면 그 해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간다. 때로 약간의 오해가 생겨도 전화 한 통화로 잘 해결되는가 하면, 뭔가 따질 게 생겨 득달같이 달려온 학부모를 마주 대한 채 한두 시간 얘기를 나누다 보면 헤어질 때는 서로 웃으며 서로에게 죄송하다고 했었다. 그게 적어도 10년도 더 된 학교의 풍경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요즘은 그런 극적인 화해의 순간을 맞닥뜨리기가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다. 시대가 변했고, 아이들이 변했다. 학부모들도 더는 예전의 그 정겨움을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학부모와 아이들을 대하는 교사 역시 변했다.


금요일 저녁 8시부터 일요일 밤 12시까지 수십 통의 카톡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평소에 그렇게도 자주 쓰던 이모티콘은 싹 뺀 채 맞춤법까지 지켜가며 던지는 간담이 서늘할 만한 문자메시지를 받아봤는가? 금요일 새벽 1시부터 1시간 반 동안, 토요일 새벽 1시부터 1시간 동안 전화 통화를 해본 적이 있는가? 전혀 새롭지도 않은 일이긴 하나 최근 5년 동안 내가 겪은 일들이었다. 물론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가령 학부모에게 욕설을 듣는다거나 멱살이 잡혔다는 정도의 얘기는 심심찮게 듣는 정도이고, 아주 가끔은 신체적인 폭행을 당했다는 얘기도 전해 듣는다. 그런 일을 겪은 당사자는 과연 어떨까? 스트레스는 극에 달하고 일상생활은 물론 다음 날 아이들과의 수업에 지장을 초래한다. 여기에서 각종 민원이나 항의가 초래하는 가장 악영향 중 하나는 다른 선량한 아이들마저 피해를 본다는 점이겠다.


한창 수업시간 중에 전화가 온다. 안 받으면 수업시간이라 받을 수 없겠거니 여길 거라 믿지만, 두 번 세 번 전화한다. 하는 수 없이 수업시간이라 늦게 받아서 죄송하다고 하거나, 수업 끝나고 전화하면 안 되겠냐고 물으면 딱 잘라 말한다. 그런 건 모르겠으니, 지금 자기 아이의 자리를 바꿔 달라고 한다. 어제 바꿨는데요, 말하려다 그러면 전화 통화만 길어질 테고, 그렇게 되면 지금 교실에 방치 중인 저 시끄러운 아이들이 신경이 쓰여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기어이 밀어 넣는다. 알겠다고 한 뒤 전화를 끊으려는데 앞으로 그 애와는 절대 앉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또 시력이 안 좋으니 뒤에는 앉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 그 애는 누구와 앉히면 되느냐고 물으려다 그만둔다. 그걸 왜 내게 물어요, 할 게 뻔하다. 어머니, 뒷자리에 앉는 사람은 따로 있나요, 말하려다 그만둔다.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처음의 이 부탁을 들어주면 앞으로 사소한 일이 있을 때마다 요구사항을 말하며 전화를 걸어온다는 것이다. 고작 전화로 휘둘려서야 되겠냐 생각하고 첫 부탁을 거절하면 들어줄 때까지 전화 공세 혹은 카톡 세례를 퍼붓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런 학부모가 한 반에 5~10% 정도 있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20% 정도는 자기 말만 하는 학부모들이라고 보면 된다. 즉 학급의 25~30% 정도의 학부모와는 소통이 불가능한 관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결국 교사는 남은 70%의 학부모와의 소통을 통해 1년의 생활을 꾸려가게 된다.

숫적으로 보면 30%는 70%에 묻히는 게 정상인데, 대부분 협조적인 데다 무리한 요구를 하는 법이 없는 70%에 비하면 나머지 30%의 활약이 너무도 커 교사를 휘청거리게 한다. 물론 이것도 정확한 수치는 아니다. 흔히 말하는 진상 학부모가 모인 학급은 이 수치를 훨씬 넘어서기도 한다.




올해 고등학교 2학년인 내 딸은 공부를 꽤 잘한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의대를 목표로 공부하고 있는데, 의대에 간다고 해서 딸을 기특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는 딸이 의사가 아니라 다른 그 어떤 직종에 종사하든 관여할 생각이 없다. 다만 지금도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느닷없이 교대 가겠다고 하면 어쩌나 싶어서이다. 그 어떤 직종이든 마찬가지겠지만, 24년간 교직에 있으면서 내가 느낀 게 있다면, 교직이 시대가 흐르면 흐를수록 개인이 감당해 내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물론 이 흐름은 아마도 끝장을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전망을 해본다.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부대 중대장에게 왜 우리 애 일 시키냐고, 작업 열외시켜 달라는 민원 전화를 하는 세상이라고 한다. 대학교 교수님에게 왜 우리 애에게 학점을 짜게 주냐며 민원 전화를 하는 세상이라고 한다. 전화 한 통이면 모든 게 될 것 같다는 환상을 심어 준 게 바로 현재의 이 시스템이고, 실제로 전화 한 통이면 꽤 많은 것들이 해소된다. 게다가 민원 전화 혹은 방문을 하는 학부모가, 시쳇말고 권력이나 돈을 쥔 사람이라면 그 영향력은 그만큼 더 클 수밖에 없기도 하다.


아이에게 맞는 교사, 아동학대로 고소당해서 고초를 겪는 교사, 아이를 가르치는 게 좋아 교사가 되었다가도 회의를 느끼고 교직에서 떠난 교사, 심지어 끝내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교사……. 어디 이런 일들이 하루 이틀 일어나는 일이었던가? 잊을 만하면 되풀이되고, 잊었다 싶으면 반복되는 일들이었다.


난 단 한 번도 내 딸이라서 고생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그건 그저 지극히 이기적인 욕심에 지나지 않을 테다. 나는 내 딸이 앞으로 해 나가야 할 일은, 고생할 때 하더라도 고생의 의미를 알고, 고생한 대가 혹은 보람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솔직히 지금의 교직사회는 보람 하나로 버텨내기엔 개인에게 지워지는 책무가 너무 막대하다. 난 그런 혼란 속에 내 딸이 뛰어드는 걸 볼 자신이 없다. 진정으로 자신이 아이들이 가르치는 것이 너무 좋아서 교직을 선택해야 한다면, 이 모든 환경적인 맹점을 딛고라도 꼭 교단에 서야겠다는 결심이 굳건하다면 나로서도 어찌해볼 도리는 없는 것이다.


종종 교대생들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있다. 그들은, 아이를 좋아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보람을 느끼기 때문에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말을 한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여러분이 정작 상대해야 할 사람들은 아이들이 아니라 학부모들이고,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 순진무구한 아이들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 시대로 향하고 있다 말이다. 거기에 또 한 마디 더 보탠다면 이 말은 꼭 하고 싶다. 직업인으로서, 기능인으로서 실력이 뛰어난 교사가 되려 하지 말고, 마음이 따뜻하고 인간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교사가 되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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