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4
나는 등단을 한 적도 없고
글쓰기를 배운 적도 없다
이미 처녀작에서도 그러했듯이 인문학적인 에세이 같은 자기 계발서가 제격이었다.
상당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에 익숙한 나이기에 문학적인 글쓰기는 다른 나라 이야기였다.
팬데믹이 익숙해질 무렵 브런치스토리(그 당시엔 그냥 '브런치'였다.)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이곳에 글을 쓰려면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고 했다.
서둘러 글을 쓰고 싶은 마음에 글 3편을 급히 적어서 보냈고 며칠 지나지 않아 승낙메일이 왔다.
나 정도의 글실력이 단번에 되는 걸 보니 간단한 형식적인 절차라고 생각했다.
이미 심사를 위해 보낸 글부터 나의 글쓰기는 시작되었다.
이 글쓰기는 책 쓰기라고 고쳐 말할 수도 있다.
책이 나올 것을 염두한 글쓰기였다.
첫날 심사용 글 세 편을 나란히 브런치에 올리고 대망의 야심 찬 글쓰기 항해는 돛을 올렸다.
이미 주제를 정했고 방향을 정했으니 노를 힘차게 젓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것은 매일 해야 했다.
새벽 4시는 마음의 물살이 거세지 않아 노를 저어 가기에 좋은 시간이었다.
하루치를 글을 브런치에 쓰고 나서 발행을 누르면 창 밖에는 태양이 축하의 팡파르를 울렸다.
새들이 새벽의 찬가를 부르다가 자동차들이 많아지자 타이어마찰소리가 아침을 열었다.
글쓰기는 100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했다
처음에는 하루에 1000자를 쓰는 게 어렵더니 점차 1500자 분량의 이야기를 지어냈다.
100일이 지나고 나니 글자수 14만 자에 원고지 848장 분량이 모여졌다.
보통 장편소설 분량보다는 조금 못 미치지만 책을 묶어내기에는 손색이 없었다.
브런치에 매일 글을 쓰면 돈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반문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책이 나온다'.
앞에서는 책을 염두한 글쓰기라고 말했지만 내심 글을 쓰면서 자신감은 다 마신 맥주캔처럼 쉽게 쪼그라들었다.
쓸 때마다 절망했고 쓰고 나서는 저장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발행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보니 '삭제'나 '없었던 일로 하기' 버튼이 브런치에 없다는 것이 참 다행이었다.)
브런치가 아니었더라면 내 방은 온통 구겨진 원고지들로 가득했을 것이다.
분량이 채워졌다고 모든 글이 책이 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글을 다 썼다고 어서 오세요 하면서 반기는 출판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뭐라고 해야겠기에 오디오북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유튜버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텀블벅에서 펀딩을 시작했다.
https://brunch.co.kr/@voice4u/118
펀딩기간 33일간 목표액 초과 319%를 달성하며 소소한 성공을 이루고 마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브러치북 출간 프로젝트에 응모했으나 그 해 겨울 낙방했다.
그렇게 나의 첫 소설이 세상에 나오지도 못하고 묻혀버리나 포기할 즈음.
올해 초 어느 중견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습니다
흥미로운 소설입니다
저희 출판사에서 책을 내 보시겠어요?
지나친 호의와 호감에 혹시 자비출판이 아닐까 우려했으나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아니었다.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계약을 했다.
전담 편집자가 배정되었고 그야말로 죽음의 퇴고 레이스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