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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치고써 Jul 02. 2024

비가 오니까……

삼백 예순한 번째 글: 마음이 차분해지고 좋습니다.

아이들이 특별실로 전담수업을 하러 간 틈을 타 잠시 컴퓨터 앞에 앉습니다. 1주일에 고작 세 번 있는 전담수업입니다. 저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냥 허투루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아닙니다. 어지간히 피곤한 게 아니라면 이 시간을 빌어 잠을 자지는 않습니다. 장소도 장소이고요. 대체로 아침에 읽던 책을 읽거나 불현듯 글감이 떠올라 글을 쓰곤 합니다.


그러고 보니 비가 오는 아침입니다. 사위가 조용한 데다 만물이 말끔히 씻겨 나간 탓인지 눈을 두는 곳마다 상쾌하기 그지없습니다. 비를 몹시도 싫어하는 저이지만, 이 아침만은 잠시나마 비를 좋아해 볼까 합니다. 유튜브에서 '지브리 스튜디오 피아노' 음악을 틀어놓고 혼자서 똥폼을 잡아봅니다. 뭐, 아무려나 상관이 없습니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어떤 일이 있어도 선생님의 체통을 잃지 않아야 할 아이들도 이 자리에 없으니 말입니다.


저답지 않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가 오는 것도 늘 나쁜 것만은 아니구나, 하고 말입니다. 분위기로 보아하니 조만간 다시 무더위가 덮칠 것 같습니다. 슬슬 눅눅한 기분이 드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그때 가서 걱정하기로 합니다. 걱정한다고 해서 그 어떤 것도 해결될 것은 없으니까요. 네, 맞습니다. 이것이 제가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지금은 이 고즈넉하고 편안한 분위기에 몸을 한 번 실어볼까 합니다.


의자에 앉아서 열심히 타이핑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허리는 곧추 세워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편안함을 더 누리려고 뒤로 몸을 기댔다가는 아이들도 없다는 이유로 스르르 잠이 들 수도 있습니다. 30분 뒤 교실로 돌아온 아이들이 저를 깨운다면 그것만큼 체면이 안 서는 일도 없겠지요. 허리를 바짝 세우고 한 글자 한 글자 처넣고 있습니다. 빈 여백이 까만 글자로 조금씩 채워지는 느낌이 싫지 않습니다.


책상 위에 올려 둔 캔커피를 한 모금 마십니다. 눈을 옆으로 돌려 보니 먼 산 등성이로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게 보입니다. 마치 나무늘보가 움직이는 것처럼 가는 듯 마는 듯 천천히 걷히고 있습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또 한 번 스르르 눈이 감기려 합니다. 생각을 그렇게 해서 그런지 안개마저 비에 씻겨 내려간 듯 투명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등바등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제 자신도 저 안개처럼 느리고 더 느리게 살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슬로우 라이프라고 하던가요? 한창 때는 느리게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도 어리석어 보였고, 게을러빠진 사람들의 핑곗거리로 여겨졌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천천히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인생의 정답일 수도 있겠다는 확신마저 듭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바쁘게 사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모두에게 똑같이 배당된 24시간이라는 정해진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일을 해내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겠습니다. 과연 그게 맞는 건가 싶습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해치우며 하루를 보내더라도 시시각각 자신을 들여다볼 기회를 잃어버린다면 그건 제 삶을 사는 주체인 저를 잃어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 아닐까요?


그렇게도 싫어하는 비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지금은 조금 누그러져 우산이 없어도 돌아다닐 만한 정도가 되었습니다. 덕분에 온 산천이 말갛게 변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새 단장을 했으니 그걸 보고 있는 제 마음도 다시 한번 가다듬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들이닥친 이 비에 제가 감사해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사진 출처: https://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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