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닥치고써 Jul 06. 2024

나이는 어디로 먹을까요?

162일 차.

얼핏 보니 스무 살 이상 차이가 나는 사람은 아닌 듯 보입니다. 육십 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 두 분이 지하철에 오릅니다. 저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쳐다볼 이유 따위는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째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하필이면 제 옆에 빈자리가 몇 개 있어서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지하철 출입문이 닫히기도 전에 곧장 제 쪽으로 다가옵니다.


그동안의 수많은 경험이 제게, 긴장해야 할 수도 있을 거라고 얘기합니다. 그들이 와서 자리에 앉기 전부터 몸에서는 거부감이 일어납니다. 난데없이 거부감이라니  말이 좀 심하지 않냐고, 지하철에 지정된 좌석이 있는 것도 아니니 아무나 앉을 수 있는 게 당연하지 않냐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다 못해 너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이 든 사람이 가까이에 오는 게 싫다는 뜻이냐고 물어볼 수도 있을 듯합니다.


당연히 그들이 나이 많은 사람이라서 제 옆에 앉는 게 싫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진 않는다고 해도 열에 아홉은, 아니 백에 구십구 명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는 행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행동 하나가 저에게 온몸에서 거부감이 일게 합니다.


결국 그들이 제 옆에 앉았습니다. 역시 이번에도 두 사람은 속칭 '썰'을 풀어내느라 주변은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차츰 귀가 잘 들리지 않을 때인지라 자연스럽게 목소리는 커지게 마련입니다. 가만히 듣다 보면 누구 집의 큰아이가 어느 대학 무슨 과에 들어갔는지, 이번에 며느리를 들인 그들의 친구집 잔치의 규모가 어땠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그나마 참을 만합니다. 정작 제가 문제 삼는 건 그들의 말이 아니라 행동 때문입니다.


여섯 명이 옆으로 나란히 앉을 수 있게 설계된 지하철 좌석은 기본적으로 그리 공간이 넉넉하지 않습니다. 물론 옆에 덩치가 큰 사람이 앉게 되면 더 불편한 건 사실이지만, 평범한 사람이 앉아도 움직일 때마다 상대방의 몸에 닿곤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런 날씨에 타인의 몸에 제 몸의 일부가 닿는다는 게 얼마나 큰 결례이고 또 불쾌한 일인지 잘 아는 저는, 지하철 좌석에 앉으면 지나칠 정도로 양팔을 옆구리에 바짝 붙입니다. 그러고는 절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냥 지금처럼 저는 내리는 순간까지 조용히 글만 씁니다. 그런데 이런 점에서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게 문제겠습니다.


방금 전의 그 두 여자분 중에 한 분이 바로 제 옆에 앉아 한참 전부터 툭툭치고 있습니다. 제 어깨에 그분의 어깨가 닿고 그분의 팔꿈치가 제 팔등에도 닿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팔꿈치로 제 옆구리를 가격합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건진 모르겠지만, 자신은 전혀 몰랐다는 듯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다 못해 그 흔한 목례 한 번 하지 않습니다. 네, 맞습니다. 옆에 앉아 있다 보면 닿을 수도 있지요. 그런데 그 행위가 수 차례 반복된다면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에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때 상대방에게 목례를 한다거나 사과한다는 건 기본 중의 가장 기본인 것입니다.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 아니라 그 목례나 사과를 통해 주의하겠다는 뜻을 전달하는 셈이니까요.


그만 좀 치시라고 한 마디 할까 하다 가까스로 참습니다. 대개 이런 경우 그들의 행동을 지적하면 지적한 사람이 별난 사람이 되기 마련이니까요.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열한 개의 역을 지나가는 동안 족히 스무 번은 닿았을 겁니다. 이런 말이 결국은 누워서 침 뱉기라는 걸 모르진 않으나, 저런 분들은 도대체 나이를 어디로 먹는 걸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정신없는 아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