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여행은?
삼백 일흔한 번째 글: 여행은 혼자 가는 것 맞나요?
누구의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흔히 누워서 하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건 남녀 간의 사랑만 한 게 없고, 앉아서 하는 것 중에선 마작이 최고이며, 서서 하는 것 중에선 골프가 으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우엔 그렇습니다. 남녀관계는 안 해 본 지 적지 않은 세월이 흘러 누워서 하는 것 중에 가장 좋은 일이라는 데에 동의할 수 없고, 개인적으론 골프를 가장 혐오하니 서서 하는 일 어쩌고 저쩌고 하는 데에도 수긍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그동안 발견한 건 바로, 앉아서 하는 일 중에 제일 재미있는 것은 바로 글쓰기였다는 점이겠습니다.
난데없이 마작을, 골프를, 심지어 남녀관계까지 언급하고 말았으나, 어쩌면 이것은 여행에 대한 제 생각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디에선가 그런 글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여행은 백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낫다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게 모든 사람에게 해당이 되는 명언은 아닌 듯합니다. 왜냐하면 최소한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단 저는 여행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그다지 기억에 남는 여행이 없다는 사실이 떠오르곤 합니다. 23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와 마지막으로 함께 가본 여행이 무려 17년 전인가 그랬었고, 이 여행마저도 지인의 가족들과 함께 열두 명의 대군단이 함께 한 여행이었으니 그다지 제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을 리 없는 여행이었습니다. 물론 그전에도 아내와 단둘이 간 여행은 부끄럽게도 신혼여행이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알콩달콩하게, 그리고 유일하게 둘이 갔던 신혼여행이 좋았냐는 궁금증이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쎄요, 저의 판단은 차치하더라도 제 아내는 다시는 곱씹고 싶지 않을 정도로 최악이었다는 말을 심심찮게 하곤 합니다. 아마도 신혼여행에 대한 환상은 고사하고 두 사람의 성격상 함께 여행을 가는 것이 어떻게 생각해도 효율적이거나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데에 따른 결과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조금도 일반적이지 못한 부부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우리 두 사람의 MBTI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볼까 합니다. 사실 저는 그다지 MBTI를 신뢰하진 않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저와 아내의 성향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이 이 MBTI에 따른 성격 유형인 것 같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MBTI는 네 가지의 분리된 선호 경향으로 나뉩니다. 외향(E)과 내향(I), 감각(S)과 직관(N), 사고(T)와 감정(F), 그리고 판단(J)과 인식(P) 등의 경향으로 나눌 수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서 앞부분이 죄다 제 아내에게, 그리고 뒷부분은 모두 저에게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해도 저와 제 아내의 MBTI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INFP이고, 제 아내는 ESTJ형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극과 극이 만났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극과 극이라도 세월이 지나면 어느 정도는 서로를 맞춰가며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꽤 안이하고 대책 없는 낙관론에 젖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저와 제 아내처럼 이런 성격 유형을 각각 갖고 있는 부부들이 세상 어딘가에는 있을 테고, 그들은 우리와는 정반대로 사랑과 정을 쌓으며 지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의 그간의 경험으로 보자면 INFP형과 ESTJ형은 결코 뭔가를 함께 하기가 쉽지 않은 유형입니다. 애초에 반대편의 성향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만났으니 그도 어쩌면 무리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 두 사람은 단 한 번도-앞서 말했듯 신혼여행을 제외하고- 두 사람만의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행선지가 딱히 정해지지 않아도 혹은 돈이 없어도 마음만 있다면 언제든 갈 수 있는 게 여행이 아니겠냐고 생각하는 저와는 달리, 구체적인 행선지와 그날의 할 일에 대한 사전 브리핑이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 여행 경비 조달에 대한 계획이나 무엇보다도 애써 몸을 움직여야 하는 당위성이 확보되어야 가는 것이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제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설명했으니 이제는 눈치를 채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네, 맞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싫어하는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여행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저에게 여행에 대해서 얘기해 주세요,라고 하면 사실 이렇다 할 얘깃거리가 없습니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잘 먹는다고, 어딜 가봤어야 할 얘기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23년을 살아오면서 아내는 지인들과 함께 결성한 문화 답사 및 사찰 순례 모임 등에서 전국 여기저기를 잘 다니고 있습니다. 당연히 단 한 번도 함께 가자고 하거나 제 의향을 묻는 일은 없습니다. 심지어 그들 모임 속에 부부가 함께 오는 경우가 있을 때에도 아내는 혼자 갑니다. 적어도 우리 두 사람에게 여행이라는 말을 떠올린다면 ‘혼자’라는 말은 옵션이 아니라 필수이기 때문이겠습니다.
처음엔 저도 그런 아내를 보면서 마음도 많이 상하고 섭섭하기도 했습니다. 뭐, 그렇다고 한들 상황이 변할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두 사람이 함께 여행을 간다는 건 적어도 우리에겐 사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미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기꺼이 그 사치를 누리고 싶다는 마음이 서로에게(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제 아내에게) 없다는 걸 이제는 잘 알고 있기에, 저도 더는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대신에 저 또한 혼자 여행을 가곤 합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1년에 서너 번 정도 혼자 여행을 갑니다. 가는 절차도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언제 언제 여행을 가려고 하는데, 그날 집에 특별한 스케줄이 있는지를 물어봅니다. 있다고 하면 다음 주로 여행을 미루면 되고, 별일이 없다고 하면 제가 생각한 바로 그 주에 혼자만의 여행길에 나섭니다. 막상 가 보면 역시 여행은 혼자 가는 게 제맛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앞으로도 이변이 없는 한 저에게 있어서의 여행이란, 언제든 시간 날 때 혼자 훌쩍 떠나는 것, 그것이 바로 여행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 여행이 무척 싫습니다. 아무리 좋은 기억을 떠올리려고 해도 미소 한 번 지을 만한 그런 기억이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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