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바삐 점심을 해결하고 직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조금이라도 구석진 공간에서는 삼삼오오 남녀들이 모여 자욱한 연기구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사방에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사람들만 눈에 띄었다. 현수는 문득 방금 전까지 피웠던 담배를 또 한 개비 꺼내어 입에 물었다. 삼십 년을 즐겨 왔던 담배였다. 우스갯소리로 손가락은 끊어내도 이것만큼은 끊을 수 없다고 했던 게 담배였다. 담당 의사도 담배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정해진 시간 동안은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가는 게 좋지 않겠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현수는 늘 앉던 작은 공원의 벤치에 주저앉았다. 잘 다려놓은 정장이 구겨지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곧 죽는다는데 이깟 옷이 대수겠는가? 편한 옷 입고 나가라는 혜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불편한 옷을 걸치고 나온 건 현수였다. 남의 말을 만들어내고 퍼뜨리길 좋아하는 이웃들에게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았다.
이제 겨우 나이 쉰 하나, 한창 일할 나이에 직장을 그만두고 공원이나 전전하는 한심한 놈이란 소리를 들을 이유는 없었다. 일이 하기 싫어 자의로 그만둔 회사가 아니잖은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현수는 직장에 사직서부터 제출했고, 그런 현수의 결정에 혜주는 아무런 의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한때 직장과 집을 오가며 정신없이 지내던 때가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아마도 그런 생각 하나쯤은 품었을 테다. 단 사흘만, 아니 딱 이틀이라도 좋으니 마음 놓고 쉬어봤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났다. 그건 모든 직장인들의 로망이고, 대개는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 로망이 된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현수는 그때 마음속에 품었던 로망을 이루었다. 결국은 그렇게 말했던 그 누군가의 말이 맞은 셈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왜 그런 작은 마음 하나 내지 못했을까? 잠이 부족하고 휴식이 턱없이 모자라도 왜 그런 고된 강행군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을까? 어쩌면 그런 혹사가 쌓여 현수에게 지금 이런 시련이 닥친 건지도 모른다. 물론 회사에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물러나고 싶었다. 특별히 회사에 기여한 것도 없는 그가 회사를 상대로 가당치도 않는 손해 배상 청구 소동 따위는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다행스러웠던 건 무기력하게 집으로 돌아와 있는 걸 보고도 혜주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찌 보면 고마운 일이었다. 다른 여자들 같았다면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그러고 있느냐며 몰아붙일 법했지만, 혜주는 그러지 않았다. 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마지막 날까지 현수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가도 된다는 뜻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캔커피가 또 생각났다. 뭔가 생각나는 게 있으면 돈 아끼지 말고 쓰라며 혜주가 두둑이 돈을 찔러줬지만 이만한 돈은 굳이 필요 없었다. 작은 횡단보도를 건너 할인점으로 향하던 도중에 낯이 익은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혜주와 친분이 깊은 연배가 조금 있는 여자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여자는 현수에게 진심 어린 마음을 담은 사람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빛에 안타까움과 동정의 빛을 동시에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여자는 현수에게 눈빛으로 많은 걸 얘기하고 있었다.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시지 그래요?”
얼마 남지도 않았다고 들었는데 이 아까운 시간을 이렇게 무의미하게 보내고 있느냐는 말로 들렸다.
"뭐, 원래 어디 다니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그러고 싶은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곧 죽는다는데 온갖 아름답고 보기 좋은 풍경들을 눈에 담아둔다고 해서 그게 무슨 그리 큰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솔직히 현수는 그런 마음이었다. 비록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도 그 시간을 요란하게 보내다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냥 일상을 살아가듯 그렇게 조용히 가고 싶었다. 몇 십 년 전에 누구에게 아무런 기별도 없이 왔듯 흔적도 없이 그냥 그렇게 사라지고 싶었다. 그게 어쩌면 현수의 진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직 길거리는 어딘가로 바삐 오가는 직장인들로 분주했다. 점심때가 한창 지났을 시간이었다. 아마도 외근을 나온 사람들인 듯했다. 현수 역시 은근히 외근을 즐기곤 했다. 다른 사람보다 몇 분이라도 더 일찍 퇴근할 수 있다는 것도 좋았고, 무엇보다도 갑갑한 사무실에 틀어 박혀 있는 것보다는 여기저기를 쏘다니는 게 적성에 맞았다. 물론 그것도 한때였다. 그랬던 그가 지금 이렇게 하릴없이 공원 벤치에 앉아 있게 될 것이라고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언제나 그랬듯 현수의 두 번째 손가락과 세 번째 손가락 사이에는 마냥 타들어가는 담배가 들려 있었다. 아직 한나절도 지나지 않아 벌써 한 갑에 가까운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무슨 입버릇이라도 되는 듯 입만 열면 담배를 그만 피우라고 잔소리를 해대던 혜주도 더는 입을 떼지 않았다. 당장 담배를 끊는다고 해도 그 실낱같은 기적은 오지 않는다는 걸 혜주도 이젠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몰라.’
분명 마음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혜주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건 누구보다도 현수가 싫었다. 어쩌면 현수는 이미 혜주를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마음속에선 아마도 곧 놔주어야 할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손에 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야 하지 않는가?
현수는 요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차분해지고 있는 중이었다. 마치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람처럼 그랬다. 누군가가 보면 해탈이라도 한 사람처럼 보일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