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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Jul 19. 2024

길면 3개월입니다.

#1.

24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가 않다. 어떤 이에게는 더 긴 것 같고, 또 다른 이에게는 그만큼의 길이를 보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도 시간은 늘 불공평해 보였다.     

현수는 요즘따라 시간이 더 빨리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과 2주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고개를 돌려 보면 다음 날이 되어 있기 일쑤였다.


아침 식사 후 오전 산책을 나온 현수는 하릴없이 늘 앉던 벤치에서 시간만 축내다 발길을 재촉했다. 꼭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도 괜스레 밖에서 점심이라도 사 먹는다며 애꿎은 돈을 허비할 순 없었다. 지금은 한 푼이라도 더 모아야 했다. 그래서일까, 그 좋아하던 바닐라 라떼도 통 마시지 못했다. 몇 번이나 지갑을 열었다 닫았다 하곤 했다. 적게는 3500원에서 많게는 6800원이나 주고 마시기엔 그만한 사치도 없는 셈이었다.  웬만한 점심식사 값은 되는 비싼 돈을 줘가면서 커피 전문 매장에서 메뉴를 고른답시고 서 있는 호사는 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민의 끝은 결국 커피 전문 매장이 아닌 공원 건너편에 있는 작은 할인 슈퍼마켓이었다. 1500원만 들이면 캔커피를 세 개나 살 수 있었다.


한때 그렇게도 몸에 좋지 않다며 캔커피를 사 먹지 말라던 혜주의 말을 현수는 번번이 어겼다. 이쯤은 마셔도 될 듯했다. 먹을 때 먹더라도 혜주는 제값 주고 제대로 된 걸 마시라고 했지만, 고작 더하기 빼기에서 오류를 일으킬 때는 아니었다. 연거푸 두 개를 마셔서 그런지 속이 쓰라렸다. 게다가 두어 시간 동안 피운 담배만 해도 여섯 개비가 넘었다. 속에서 연신 헛구역질이 났다. 평소 같았다면 어쩐 일인가 싶어 긴장이라도 했겠지만, 이미 그러기엔 늦었다. 두 개는커녕 이백 개의 캔커피를 들이붓고, 수십 갑의 담배를 피운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탈이 날 몸은 아니었다.


마냥 걷다 어느새 집 앞까지 온 현수는 도어록 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려다 스마트키를 둥그런 홈에 갖다 댔다. 이젠 뭔가를 힘들여한다는 것도 버거웠다. 손으로 번호를 누를 때마다 단번에 열리는 법이 없던 문이었다.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건전지로 몇 번이나 갈아 끼워 넣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고장 난 게 틀림없다며, 조만간 업자를 부르겠다는 운만 띄우다 여기까지 와버렸다. 현수는 자기가 떠나고 나면 이런 자질구레한 일까지 혜주가 떠맡아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가급적이면 큰소리가 나지 않게 자동으로 닫히는 현관문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흐트러진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거실로 들어서던 현수는 혜주의 목소리를 들었다. 혼자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지나치게 목소리가 컸다.

"네, 올해 마흔여섯입니다. 아이요? 일찍 결혼해서 아이들도 다 큰 상태예요. 일하는 데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한참 전부터 누구와 통화를 하고 있는 건지 현수가 들어오는 것도 혜주는 몰랐다. 통화를 방해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보다 무슨 내용의 얘기를 주고받는지 궁금했다.

"언제부터 일할 수 있냐고요? 네, 11월부터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듣자 하니 어느 식당의 홀 서빙 일인 모양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런 일을 해 본 적이 없던 혜주가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을지 묻고 싶었다. 역시 엄마의 힘은 대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도 직장을 구할 생각을 하는 혜주가 대견했다. 그러다 문득 혜주가 말한 그 11월이라는 시점이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치받쳐 왔다.


11월에 가능하다는 말은 최소한 10월은 안 된다는 얘기였다. 게다가 11월이라면 현수가 이미 떠나고 없을 때였다. 별생각 없이 듣던 현수는 온몸이 땅속으로 꺼져 버릴 것 같았다. 가는 사람은 그렇다고 쳐도 남아 있는 이는 그들의 삶을 이어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혜주의 생각을  이해 못 할 것도 없지만, 혜주의 입을 통해 그런 말을 들으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늘 부정하고 타협했다가 기어이 수용하곤 했던 그 사실이, 세 달도 안 되어 결국엔 죽게 된다는 그 사실이, 애써 부여잡고 있던 삶의 끈을 놓게 만드는 것 같았다.


아무리 현실에 빨리 적응하는 게 여자라지만, 지금 마음 같아선 자신이 어서 죽기를 기다리냐고 묻고 싶었다. 설마 그러기야 할까 여겼다. 특별히 금슬이 좋은 부부는 아니라고 해도, 곧 죽을 사람이 언제 죽을까 하며 노심초사 기다릴 만큼 현수는 잘못한 게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다가 현수는 결국 기척을 내고 말았다. 자신의 뜻과는 관계없이 엿듣게 된 꼴이었다.

혜주는 고개를 숙인 채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난 그저 언젠가는 일해야 할 것 같으니까 미리 연락해 본 거야. 신경 쓰지 마."

그렇게 둘러댄 자신의 모습이 영 못마땅했는지 혜주는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정작 말은 그렇게 했어도 현수가 얼른 죽기를 염한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되어 버린 셈이었다.


이제는 별 다른 감흥도 일어나지 않았다. 누가 혜주를 보고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혜주는 현수가 병원을 다녀온 이후부터, 먹먹하게 전하던 현수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던 건지도 모른다. 하긴 남편이 길면 세 달, 빠르면 한 달이라는데 어느 누가 멀쩡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건 어쩌면 슬픔의 몫과는 별개로,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자동계산기와 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언제부턴가 소화가 잘 안 된다 싶었다. 즐겁고 화기애애한 몇 안 되던 때를 제외하고 현수는 밥만 먹으면 체했다. 그건 어떤 음식을 먹어도 마찬가지였고, 식사 후 채 10분도 안 되어 변으로 다 배출하곤 했다. 그때만 해도 그건 그저 쾌변의 신호라고 생각했다. 종종 예리한 칼날로 후벼 파듯 아랫배에 통증이 오던 것도 변 때문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네, 뭐라고요?"

"길어 봤자 세 달, 지금 당장 돌아가신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현수는 자신의 얘기가 아니라 마치 누군가의 불행한 소식을 전해 듣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수술해도 마찬가지인가요?"

"환자분이 원하시면 수술해 드릴 수는 있지만 의학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냉정함을 넘어서 꽤나 시건방진 의사였다. 어쩌면 그렇게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담담하게 해내는지, 과연 그래서 의사인가 싶었다. 나이는 마흔도 안 되어 보였다. 젊음이 무기라도 되는 듯 그 직종에선 소화하기 어려운 투톤의 색깔을, 짧게 깎아 올려붙인 머리에 띠처럼 두르고 있었다. 의사는 과도한 음주와 흡연을 삼가라는 그 흔해빠진 조언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동안 못 한 것 다 해 보세요.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으니까요."

항암 치료라도 하면 좋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려던 현수는 의사의 표정을 보고 확신이 들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희망이 없다는 걸 말이다.


그랬던 게 벌써 2주 전이었으니 현수에게는 두 달 반쯤 남은 셈이었다. 물론 그것도 현수에게 가장 좋은 시나리오가 배정될 때의 얘기겠다. 혜주와 더 머쓱해지기 전에 현수는 바람이라도 쐬고 오겠다며 또 한 번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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