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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Aug 01. 2024

무례한 화자

삼백 여든세 번째 글: 안물안궁인 시대입니다.

대구역에서 내리면 지하철을 타기 위해 이동하는 통로가 있습니다. 롯데백화점과 연결되는 그 통로 중간쯤에 꽤 넓은 홀이 나옵니다. 홀의 구석진 곳에 몇 개의 기둥이 서 있고 그중의 한 기둥엔 네 면에 각각 설치된 돌벤치가 나옵니다. 갈 때마다 느끼는 건데 그곳엔 늘 연로하신 분들이 앉아 있곤 합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혹은 기차를 타기 위해 이동 중이던 그분들이 다리가 아파 잠시 쉬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그 좁은 돌벤치에 열 명에 가까운 분들이 빼곡히 둘러앉아 있습니다. 마침 제 정면에 보이는 돌 벤치에 나이가 지긋한 두 여자분이 앉아 있습니다. 두 분 사이에는 한 남자분이 있고요. 세 분은 얼핏 봐도 일행은 아닌 듯했습니다. 저마다 다른 곳을 보고 있으니까요. 순간 호기심이 생겨 폰을 확인하는 척하며 잠시 세 사람을 지켜보기로 합니다.


누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남자분이 뜬금없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단군왕검이 개국한 이래로 외세의 침략이 몇 차례나 있었는지, 그 위급한 순간마다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외세를 물리쳤는지 읊어댑니다. 아무리 봐도 뜬금없을 뿐입니다. 하릴없이 부채만 연신 흔들어대며 남자의 양 옆에 앉은 두 여자분은 이미 표정으로 남자에게 대답을 한 상태입니다.

'안물안궁이거든요.'


여자분들은 잘못 자리를 잡았다는 짜증이 얼굴에 역력합니다. 기회만 되면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은 표정이지만, 일어서는 순간 그들은 딴 곳에 자리가 날 때까지 서서 기다려야 합니다.


순간 남자분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정식 과목에는 없지만 저 또한 시간이 날 때면 반 아이들에게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는지라 남자분의 때 아닌 강의를 들어 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수준 내에선 남자분의 이야기에 별다른 오류가 없어 보였습니다. 저 정도의 지식을 가지려면 역사에 관해 꽤 많은 책을 읽어야 장착이 가능한 정도가 아니겠나 싶었습니다. 마치 유튜브 동영상 강의를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오래된 라디오 채널에서 들릴 법한 얘기였습니다.


순풍에 돛을 단 듯 어느새 얘기는 정유재란까지 왔습니다. 참다못한 오른쪽의 여자분이 벌떡 일어나 대구역 쪽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남자분이 막 병자호란 얘기를 하려는데 왼쪽편의 여자분도 일어나 지하철 역 방향으로 내려갑니다. 계속 듣고 있으면 최소한 한국전쟁까지 언급할 기세입니다.


아무도 없이 혼자 앉아 있던 남자분은 이내 말을 멈추며 쓴맛을 다십니다. 주변을 둘러보다 멀뚱히 서 있던 저와 눈이 마주칩니다.

'이리 와 봐. 재미있는 얘기해 줄게.'

꼭 그렇게 말하기라도 할 듯 그 남자분의 눈빛이 반짝입니다. 만약 제가 옆에 앉는다면 이야기는 병자호란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1636년부터이니 기껏해야 400년 정도만 들으면 됩니다. 거의 4천 년에 가까운 외세 침략의 역사를 듣다 자리를 뜨고 만 그 여자분들이 생각났습니다.


갈 길이 바쁜 저는 남자분의 간절한 눈빛을 뒤로한 채 지하철을 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사람은 나이가 들면 말이 많아질까, 하고 말입니다. 나이가 지긋한 남자는 어딜 가서든 틈만 나면 왜 자신의 지식을 뽐내려 하는지, 여자는 왜 아무에게나 들으려면 듣고 아니면 말라는 식으로 얘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분명 혼잣말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큰 목소리로 말입니다.


그들의 나이와 제 나이를 추산해 보니 대충 20여 년 정도 터울이 집니다. 저도 20년 뒤면 아무 데나 가서 저러고 있을까요? 생각할수록 끔찍한 가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물안궁인 시대인데, 특히 나이 든 사람의 이야기는 절대 사절인 때인데, 왜 그들은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모르는 걸까요?


사진 출처: https://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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