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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Aug 02. 2024

어떤 융통성

삼백 여든네 번째 글: 죽기 전에는 네 발로 걸어와서 받아가!

누구나 한 번씩 병원을 다녀보면서 불편함을 느꼈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 병원이 멀다거나 혹은 시설이 너무 불편하다거나 간혹 꽤 큰 병원 같은 경우엔 미로처럼 여기저기에 필요한 곳이 흩어져 있어서 찾아다니느라 진을 빼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불편함이야 사실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부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것이 싫다면 혹은 너무 불편하다면 더 시설이 좋고 편리한 곳으로 옮기면 되니까요. 그런데 정작 오늘 제가 느낀 불편함은 이와는 조금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습니다.


최근에 몇 가지 일이 있어서 어딘가에 뭘 제출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이럴 때 가장 답답한 게 저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서류를 요구할 때일 것입니다. 만약 저의 진료내역서나 진단서라면 좀 귀찮아도 직접 가서 떼오면 되고, 하다못해 요즘은 본인이라면 인터넷에서도 발급이 가능하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필요한 서류가 제 것이 아닌 타인의 것일 때입니다. 바로 장인어른의 진단서 두 건인데, 심정적으로는 '우리가 남이가?'라고 하는데 법에서는 엄연히 '너거는 남이다!'라고 테두리를 긋고 있었습니다.


뭐, 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의사나 간호사도 아니고 병원 관계자도 아니라서 이렇게 무지한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진단서조차도 진단을 내릴 담당교수와 외래 예약을 잡아야 한다고 하네요. 저와 얘기를 나눈 간호사가 두 가지를 들어 제 요청을 단칼에 자르더군요.


1. 진단서를 발급받으려면 환자 본인이 신분증을 반드시 지참하고 이 자리에 와야 합니다.
2. 진단서를 발급받을 때에는 환자를 진료한 담당 교수와 외래 예약을 한 상태라야 가능합니다.


이미 병원에 오기 전에 혹시나 하고 인터넷부터 찾아봤었습니다.


본인 신분증을 확인 후 본인에게 직접 발급함을 원칙으로 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그 근거는 의료법 제17조에 의거한 것이라고 하는데, 최초 (원본) 진단서 발급 시에는 진료기록부등의 경우와 달리 환자의 의식이 있는 경우에는 대리인에게 위임이 불가함을 알려드린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뭐, 이런 개떡 같은 원칙이 다 있냐고 혼잣말로 욕설을 내뱉었습니다.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며 계속 읽어 보니 그런 문구도 나오더군요.


대리인이 발급받는 사유: 사망하신 분일 때, 의식불명인 분일 때


게다가 의식불명확인 증명서 같은 확인 서류도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솔직히 기가 막혔습니다. 지금 저희 장인은 거동이 많이 불편하십니다. 그런데 그런 것에는 아랑곳없이 무조건 본인이 와야 한다고 합니다. 달랑 그 종이 한두 장 받으러 말입니다.


안일하게 생각한 제 무지의 소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족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각종 서류를 구비해서 데스크에 가서 사정을 얘기하면 그 정도는 발급해 주지 않을까, 하며 너무 쉽게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래도 오늘 저는 그런 빈 틈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은근히 했던 듯합니다.


물론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으면 공인인증서 등을 발급받아 본인 인증을 거친 후에 인터넷으로 본인이 직접 발급하면 된다고 합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시겠지요? 팔순이 넘은 분이 무슨 인터넷에, 공인인증서 따위를 운운하겠습니까? 물론 안 그런 분도 있다지만, 제가 알고 있는 많은 노인들은 인터넷이나 카톡이나 앱 같은 문화와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인 인증요? 그분들이 PC나 스마트폰에서 관련 홈페이지나 앱을 열고 들어가 문자 인증을 통해서 자기가 본인임을 증명한다고요? 다른 분은 몰라도 돌아가셨던 제 양친이나 지금의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그런 세계에 살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올바른 사회가 되려면 빈 틈이 존재해선 안 됩니다. 어떻게든 허술한 틈을 타 편법적으로 뭔가를 편취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지금과 같은 세상이라면 더더욱 그것은 안 되는 일이긴 합니다. 최소한의 원리원칙이라는 게 있어야 어떤 제도이든 올바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리원칙이 명백하게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려는 제가 경우에 어긋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원리원칙이 지켜져야 그게 개인을 보호하고 그 존엄의 가치를 인정하는 일이라는 것도 모르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개인정보보호법이나 (오늘과 같은 경우) 의료법 제17조에 따르면 개인정보가 확실히 지켜지는 보다 많은 사람들의 공익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겠습니다. 다만 오늘처럼 반드시 뭔가가 필요한 경우, 현실적인 여건의 불편이나 가능성 등을 고려하여 예외적인 조항도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런 자그마한 빈 틈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누군가가 영 생뚱맞은 진단을 내리더군요. 그러니까 사람은 아프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아무튼 오늘 이래저래 많이 불편하고 짜증이 나는 하루였습니다.


사진 출처: https://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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