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이 끝난 개학날이다 보니 남아서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직장인의 생명은 칼퇴근이라 하지요. 저는 이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습니다. 마치 F1 경기를 보고 있는 듯 '땡'하기 무섭게 교문을 빠져나가는 수많은 차들을 보면서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여깁니다. 사람이 북적대는 낮엔 정신이 산만해지기 십상이니까요. 아무리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뭔가를 하려 할 때는 혼자 있는 것이 좋습니다.전교생이 900명 남짓한 그 큰 건물에 저만 남아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저의 시간입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하던가요? 해가 뜨거나 질 때의 순간이 옵니다. 촛불이 마지막으로 꺼지기 전 맹렬한 빛으로 타오르듯 밝음과 어두움이 혹은 어두움과 밝음이 교차하는 그 순간에 극도의 어두움이 도사리고 있는 법입니다. 뜨는 해를 혹은 지는 해를 바라보는 제게 뭔가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옵니다. 바로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 저는 그 녀석이 제가 키우는 개인지 절 해치려는 늑대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보면 개와 늑대의 시간은 제 존재를 위협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제 존재를 지키려면 이성 따위는 필요 없는지도 모릅니다. 동물적인 감각과 본능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순간의 반응이 제 자신을 지키는 데 훨씬 더 믿을 만하니까요. 녀석이 다가오기를 기다립니다. 어느 정도의 윤곽이 식별되는 순간이 중요하겠습니다. 제가 키우는 개라면 두 팔을 벌려 안아주고 쓰다 듬으면 되지만, 만약 늑대라면 가능한 한 멀리 도망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아니면 높은 나무에라도 올라가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정 안 되겠다 싶으면 하다 못해 가장 묵직한 돌이라도 손에 쥐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전 참 좋은 시절에 태어난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제 앞에 늑대가 나타날 일은 제로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더는 이 어둑어둑한 시간에 제 생명을 지키려는 사투를 벌이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누대를 거쳐오는 동안 이런 본능적인 감각은 분명 제 DNA에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젠 그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몸이 늘어집니다. 짧은 시간이면 도착하니 눈을 붙일 수는 없지만, 잠시 차창에 기대는 건 가능합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순간 속으로, 그 시간의 한가운데로 어느덧 몸이 밀려 들어갑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광을 보니 지금이 바로 개와 늑대의 시간인 듯합니다. 이성의 활동이 누그러들고 본능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간을 가장 좋아합니다.
혼자 있는 시간입니다. 제가 무엇을 하든 아무도 제게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제야 저는 제 몸속 어딘가에 새겨져 있는 그 DNA를 끄집어냅니다. 그리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하루 종일 어느 모퉁이에 웅크리고 있었을 저를 기어이 찾아냅니다. 속에 있던 저와 바깥의 제가 만나는 순간입니다. 이때 저는 글을 씁니다. 아무것도 할 게 없는 바로 이 순간에 말입니다.
글이 지금처럼 두서가 없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미사여구 따위를 동원할 수 없어도 괜찮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쓰는 글이 가장 저 다운 글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떻게든 더 잘 쓰기 위해, 더 돋보이기 위해 쓰는 글이 아니니까요. 그저 저와 또 다른 제가 만나 나누는 대화를 충실히 옮겨 적었을 뿐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