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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Sep 05. 2024

행복, 십칠 분

사백 일곱 번째 글: 어찌나 편안하던지요?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는 법입니다. 무슨 얘기인고 하니, 기차를 타고 오면서 모처럼 만에 바깥 경치만 내다보며 왔다는 말입니다. 늘 그랬듯 오늘 그 시간만큼은 브런치스토리 앱을 열지 않았습니다. 일단 쓰고 싶은 글이 없었고, 쓸 만한 소재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니 떠올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가 좋았습니다. 창쪽의 좌석을 발권해서 편히 앉았습니다. 다행히도 제 옆의 통로 쪽 자리도 비어 있어 무거운 가방을 올려 둘 수 있었습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여유였을까요? 미처 붙잡을 새 없이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광이 더없이 정겨웠습니다. 지나가면 지나가는 대로 좋았습니다. 뒤이어 따라오는 풍광들이 저를 달래 주었습니다. 어두워진 공간에서 이리도 편안한 느낌을 가질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흔히 힐링한다고 하지요. 제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말은 아닙니다. '쉼'이라는 더 좋은 표현을 멀쩡히 놔두고, 고상해 보이는 듯한 착각 속에 빠져 살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 경종을 울리기 때문입니다.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입니다. 딱 기분을 좋게 할 만큼 따뜻한 물을 욕조에 받아놓고 몸을 깊이 담근 느낌입니다. 고작 이 17분의 시간이 제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큰 힐링의, 아니 '쉼'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실 저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은 글을 쓰는 시간입니다. 잘 쓰든 못 쓰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고, 글을 쓰면서 '쉼' 속에 매몰될 수 있다는 것이 크나큰 행복입니다. 감사하게도 이 시간에 저는, 일상이 바빠 돌아볼 틈이 없었던 제 자신을 돌아보곤 합니다. 또 하루를 혹은 한 주간을 얼마나 괜찮게 보냈는지 복기해 봅니다. 가끔은 꽤 깊은 곳까지 내려가 그동안 억눌려 있던, 어쩌면 저의 참모습인지도 모르는 또 하나의 '나'를 만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시간을 더해도 좋을 듯합니다. 이런 달콤한 '쉼'이 숨어 있는 오늘의 이 시간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오래 이 길을 오고 가면서 왜 이런 즐거움과 기쁨을 이제야 찾게 되었을까요?


곧 기차가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막 송출되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짐을 챙겨드는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객차 안이 술렁입니다. 저는 그냥 옆에 놓인 백팩만 둘러메면 그뿐입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슬슬 아쉬워지려 합니다. ITX-새마을호가 왜관역에서 대구역까지 오는 그 짧은 17분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한동안은 이 기분에 젖어 있고 싶지만, 3분만 있으면 또 바삐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플랫폼에 발이 닿고 얼마 안 있어 기차는 다시 출발합니다. 지금은 저렇게 떠나지만 결국 내일 또 저 기차를 타야 합니다. 어딘지 모르게 시지프스가 된 기분입니다. 아무리 밀어 올려도 결국엔 제자리에 오고 마는 무거운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운명인 것입니다. 뭐, 그래도 그것 역시 나쁘지 않습니다. 남은 시간 잘 쉬고, 내일 다시 바위를 밀어 올리면 되니까요.


행복이 뭐 별 게 있겠습니까? 이리도 작은 것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진짜 행복이 아닌가 싶습니다. 적어도 오늘밤만큼은 행복한 밤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네요.


사진 출처: https://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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