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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Sep 06. 2024

낭송의 미래 2

0817

앞에서 우리는 현재 한국에서의 시낭송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 그 민낯의 현주소를 살펴보았다.



늘 그렇듯이 비판은 사려 깊게 고민된 것들에 대해서만 유의미하고 가치를 가진다. 그 외의 느슨하게 설계된 사항들은 비난의 대상이다. 비판 또한 대안 품은 애정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특히 시낭송교육 부분은 실질적으로 전반적인 낭송문화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므로 어떤 교육방식을 피해야 하는지를 하나씩 짚어보자.



우선, 시낭송지도자의 지도방식에 있어서 따라 하기식의 방식은 근본적으로 위태롭다.

급한 대로 대회용으로는 잠시 재미를 볼 수는 있겠지만 낭송을 깊이 있게 하면서 유니크하게 성장하게 하는 데에는 치명적이다. 게다가 청출어람은 요원하다.



누가 이미 소비한 감각을 흉내 낸다는 것은 주체적 예술가로서의 낭송을 포기하고 기술자로서의 낭송을 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답이 있는 듯 보여 수월해 보이지만 매번의 다른 시를 만날 때마다 타자에 의존해야 낭송이 가능해지는 부작용을 감수해야 한다. 나의 감각과 타인의 감각은 다르다. 시낭송교육은 시낭송을 잘하는 이가 자신이 잘 한 적 있었던, 혹은 그것으로 상을 받았던 순간의 발화를 고스란히 소리만 따라 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이 점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 시낭송지도자들의 한계다)



마치 자신의 출근할 때의 발걸음과 퇴근할 때의 발걸음을 보여주고 흉내 내게 해서 가르치는 것과 같다. 출근 발걸음과 퇴근 발걸음이 따로 유별나게 존재하는 것처럼! 자신의 발걸음이 유일한 것처럼!

혹시 한 행의 시라도 따라 해 보라고 가르친다면 당신은 그 시낭송수업을 박차고 나가라! 나의 낭송을 가짜로 만들고 아류로 만드는 것보다 나의 고유하고 개성 있는 낭송을 기다려주지 않고 기대해주지 않는 그의 무심과 무지가 무례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창의와 신선함이 배제된 커리큘럼의 천편일률적이고 엉성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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