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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Sep 05. 2024

연서는 유서

0816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
가을비는 지난해 다녀갔다


안현미는 그의 시 <와유>에서 '내가 만약 옛사람 되어 한시에 시를 적는다면... 훗날의 그대에게 연서를' 이렇게 이렇게 쓰겠노라 말한다.


세상의 모든 연서는 유서가 아닌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정의 위태로운 벼랑 끝에서 쓰는 유서.


처절할수록 연서는 쓰는 이와 받고 읽을 이에게 삶의 정반대 편에 외롭게 웅크리고 있는 감각들을 고스란히 맛보게 한다.


마치 죽음의 그것 같은.


죽을 것 같아지는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완벽한 연서가 완성된다.


너무 강력하기에 연서는 죽음만큼 치명적이고 절망처럼 나약하다.


연서 앞의 모든 밤들은 하얗게 질리고 마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불쑥 다다를 즈음에 안현미의 또 다른 시 <불면의 뒤란>을 발견한다.


가끔 내가 쓰는 모든 시들이 유서 같다가
그것들이 모두 연서임을 깨닫는 새벽이 도착한다


이어 그가 나와 똑같은 말을 해서 놀랍다.


'모든 연서는 죽음과 함께 동봉되어 오는 유서라고'


사랑은 죽음체험이 아닌가.


나를 죽이고

나의 습관을 죽이고

나의 관습을 죽이고

나의 시간을 죽이고 나의 공간을 죽이고

내가 움켜쥔 온갖 것들을 죽이고 나서야

겨우 마주할 수 있는 숭고한 죽음같은 사랑의 순간!


사랑 앞에 던지는 유서같은 연서들 무더기와 죽음 앞에 내미는 연서같은 단 한장의 유서 사이에서 우리는 오늘을 한 편의 시처럼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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