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섯 번째 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학교 앞 버스정류장에 제법 큰 공터가 있다. 아니다, 원래는 공터였던 것 같은데 사진에서 보다시피 이름도 모를 풀들로 흐드러져 있다. 언제부터 저렇게 울창했었는지 나로선 알 도리가 없다. 내가 작년에 이곳으로 발령받아오던 날부터 사실은 저런 상태였다. 아니다, 분명 더 심한 상태였다. 맞은편에 누군가가 있다면, 그래봤자 직선거리로 30미터도 안 되는 거리일 테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면 사람이 있다는 것도, 혹은 자동차가 지나가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그래서 그렇게 울창했을 때에는 사람들이 근처에 서서 담배를 많이 피웠다. 주변에 내가 근무하는 초등학교와 100여 미터 밑에 중학교까지 있지만, 작은 소방도로 같은 이곳에 서면 그 어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다. 오죽하면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저렇게 울창한 수풀 속에 누군가가 있어서 웅크리고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수풀 한가운데로 끌고 들어가도 모를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저렇게 울창하던 수풀이 일시에 잘려나간 일이 있었다. 아마 한두 달 전이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군청으로 민원이 들어간 것인지, 아니면 도로 관리 차원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중장비가 동원되어 이 일대를 싹 다 정비했었다. 한 이틀 정도 일대가 중장비 소리들로 요란해 불편함을 겪었지만, 사흘쯤 되던 날 퇴근하는 길에 들렀다가 깜짝 놀라게 되었다. 거의 나무 밑동만 남기고 베어내듯 그렇게 저 많던 풀들이 죄다 잘려 나갔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갈 길 가느라 바빴고, 이전처럼 몇 명이라도 서서 담배를 태우는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보면 누군지 알아볼 정도로 확연히 시야가 트인 관계로 굳이 이곳에 서서 담배를 피울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그다지 보기 싫지는 않았다. 여기저기 베어낸 풀들을 눕혀 놓아 마치 벌초 혹은 벌목의 현장을 보는 것 같았지만, 한눈에 전후방과 측면의 풍광이 눈에 들어와 나쁘지 않았다. 아마 이 정도라면 밤에 다녀도 별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한창 바쁜 7월이 지나고 오늘 문득 휴대폰을 들고 셔터를 누르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언제 이렇게까지 다시 자라났는지 알 수 없었다. 햇빛도 적절하게 혹은 어쩌면 과할 정도로 많이 내리 쬐이고, 비도 자주 내렸기 때문인지 마치 사람이 작정하고 심기라도 한 듯 다시 한번 예전의 그 울창한 수풀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질긴 생명력 앞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잠시 움츠렸다가도 심지어는 다시는 소생불능일 것 같이 보이다가도 금세 그 작은 틈을 비집고 올라오는 저 생명력을 본받았으면 좋겠다.
세상에 죽어도 마땅한 사람은 없다. 대다수의 사람을 위해 정작 죽어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도, 적어도 본인은 그 생명에 미련을 둘 것이다. 결과적으로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세상에 죽어도 마땅한 사람은 없다. 그것이 어떤 이유이든, 어떤 상황에서든 살아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린 태어났다. 이건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먼저 가는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명예를 위해,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떠한 이유에서든 우린 살아야 한다. 구질구질하게 의미 없는 목숨을 이어가야 한다는 말 또한 아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리고 지나 보면 그 어떤 것도 견딜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렇게 설계되어 있는 것이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