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고 또 퇴고
사백 스물세 번째 글: 세상에 똑같은 글은 없습니다.
지금 한창 엉뚱한 작업에 온 신경을 쏟아붓는 중입니다. 일전에 써놓았던 소설을 죄다 꺼내 들었습니다. 열 편 남짓 되더군요. 어딘가에 또 틀어박혀 있지 싶은데, 일단 지금 찾아놓은 건 이쯤 됩니다. 때마침 맞이한 연휴 주간을 이용해 한 곳에 모으기 위함입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그런지는 저도 모릅니다. 특별한 목적 따위는 없습니다. 브런치북 공모전에 낼 생각은 없습니다. 또 신춘문예 시즌이 다가오니 투고할 원고를 다듬으려는 생각도 없습니다. 그냥 다듬고 싶을 뿐입니다. 마치 돌을 수집하는 사람이 하릴없이 돌을 쓸고 닦는 심정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참 신기한 건 초고를 읽을 때마다 다른 표현법이 생각난다는 겁니다. 그건 마치 361개의 점 위에 놓인 바둑돌들이 그려내는 그 무궁무진한 경우의 수를 대하고 있는 기분입니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바둑을 둬온 수백 년 동안 단 한 판도 같은 판이 없다고 할까요? 저 역시 제가 쓴 소설들을 읽고 다듬을 때마다 늘 그 모습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걸 느끼곤 합니다.
세상에 똑같은 작품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입니다. 똑같은 사람인 제가 쓴 것인데도 말입니다. 거창하게는 없던 장면을 추가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지금까지 등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이때에는 이 새로운 인물로 인해 작품의 분량이 적지 않게 늘어나기도 합니다. 하다못해 낱말 몇 개만 바꿔도 이전과는 다른 느낌을 줍니다.
헤밍웨이가 '모든 초고는 쓰레기'라고 했던 걸로 압니다. 솔직히 말해서 '쓰레기'라고 한 건지 '걸레'라고 한 건지 헷갈립니다만, 그만큼 보잘것없는 게 초고라는 것이겠습니다. 물론 그 초고를 쓴 사람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이 소중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될까요? 모든 초고는 걸레이고 쓰레기인 건 분명하지만, 완결했다는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은 먹을 수 있지만, 완성시키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일일 테니까요. 그래서 선뜻 퇴고 작업에 나서기가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만큼 소중하게 생각되기 때문에 차마 손을 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고를 썼다면, 그중에서도 시나 소설 혹은 동화를 썼다면 반드시 이 퇴고 작업을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보다 더 작품다운 작품의 꼴을 갖춰 나가게 됩니다. 장기나 바둑을 둘 때 정작 대국 당사자들보다 옆에서 관전하는 사람에게 판의 형세가 더 잘 보이듯, 스토리에 깊이 몰입해 쓰고 있던 당시에는 볼 수 없었던 부분들이 초고 완결 후에는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칩니다. 만약 노트북이나 PC에 저장된 파일이라면 덮어쓰기를 수십 번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큰 맥락에선 다른 점이 거의 없을 겁니다. 그래도 퇴고 과정 중 자잘한 부분에서 변화를 주곤 합니다. 그런 변화들은 멀쩡히 살아 있던 등장인물들이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다거나, 심지어 앞에서 말했듯 없었던 인물이 탄생하게 되기도 합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저의 소설들이 퇴고를 거듭할 때마다 조금은 더 읽을 만한 형태로 거듭날 것이라고 말입니다. 책으로 나올 수 없어도 괜찮습니다. 공모전에 투고해 수상하거나 등단하지 못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재미가 있건 없건 간에 제가 쓴 소설은 이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일 테니까요.
이 엄숙한 작업의 시간을 누릴 수 있어서 마냥 좋습니다. 언젠가 죄다 펼쳐놓고 읽으며 혼자 흐뭇해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 세상에 단 하나인 저라는 소설가로 빙의한 이 시간들이 제게 있어서 행복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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